[ovellia] 13권 완결(상) [기고] 전뇌코일(電脳コイ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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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나는 잠들어 있다. 나는 깨어나고 있다.
현실세계의 내 몸은 침대에 누워있었고,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의 날씨를 모른다. 계절의 냄새를 모른다. 결석한 사이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무엇 하나 모른다.
아마도 교정에 나란히 선 나무에서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복도 위로 운반되는 급식 카트의 스튜냄비에서 김이 따뜻하게 피어오르고, 복도에서 애들이 목도리를 둘둘 감고 하얀 입김을 뱉으면서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줄곧 익숙했던 일상. 그것을 생각하면 약간 울 것 같았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얻기 힘든 것인지 뼈저릴 정도로 잘 알았으니까. 내가 다니던 길, 지냈던 교실, 교정에서 올려다본 하늘, 숙제를 까먹고 안 해 와서 움찔움찔했던 수업, 연결된 패스를 누군가가 받아 골을 넣고 모두 모여 하이터치를 했던 축구시합.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하나하나가 이제 와서는 매우 사랑스러웠다.
비슷한 심정으로 울 것 같은 일이 전에도 딱 하나 있었다. 칸나를 잃었을 때였다. 별 것도 아니었던 일상이 자꾸자꾸 떠올라서, 두 번 다시 이런 후회는 하지 않겠다며 굳게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때처럼 잃은 것에 한탄하고 슬픈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람이란 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자주 망각하는 어설픈 생물이란 말인가.

나는 잠들어있다. 그리고 나는 깨어나고 있다.
전뇌세계의 내 전뇌체는 쉴 틈도 없이 활동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한탄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눈물이 내 뺨을 적셨다. 누군가의 고통에 나는 울부짖었다. 온갖 감정이 내 전뇌체에 흘러들어와 선명한 영상을 보였다. 지금 내게는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일이 보였다.
이것은 혹시 평범한 꿈인가? 단순한 꿈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뭔가 해야만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흘러들어오는 감정과 사념에 대해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이쪽세계에서.

사촌인 하라카와 타마코 누나는 일찍이 프로토타입 안경을 건네받은 네 명의 초등학생 중 한 명이었다. 누나와 누나의 친구들은 모니터가 되었고, 이윽고 본격적으로 발매된 코일코일스의 안경컴퓨터는 순식간에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8년 전에 다이코쿠의 안경이벤트 회장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안경의 유행은 급속도로 사그라져서 결국 코일코일스는 도산했다.
이벤트회장의 사고는 누나들, 즉 모니터 요원들의 운명도 바꾸었다. 사고의 원인을 집요하게 추적하던 누나들은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만 모양이었다. 그 사건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도 없었을 뿐더러 누나도 말을 꺼내려고 하지도 않아서 나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사건이 있은 뒤 누나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누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함께 프로토타입 안경을 즐기고, 함께 안경사고의 원인을 찾던 세 명의 동료들을 잃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누나는 잃은 동료들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누나에게 있어서 안경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여행이었다.
지금 누나는 다이코쿠에서 멀리 떨어진, 동해에서 가까운 곳인 이루히메에 있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조금 더 가면 나오는 하루히사에서, 결국 동료인 네코메 소스케와 다시 만났다.

네코에 소스케는 안경유랑민이었다. 유랑민이란, 일반적으로 열세 살이 되면 서서히 사라져야하는 안경능력이 유효기한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안경을 벗지 않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안경능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안경에 남아있는 기억과 기록에 집착해서 안경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존형이라고 하며, 이 또한 유랑민에 해당한다.
<나는 살아남았어.> 네코메는 말했다. <안경에서 살아 돌아왔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구해야만해.>
사실 나는 네코메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 모른다. 만난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쪽세계에서는 그 사람의 뼈저릴 정도로 사무친 각오를 마치 나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었다.
누나가 처음 만난 동료, 네코메 소스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굳이 살아돌아왔다고 말할 정도라면, 대체 무슨 일을 겪었단 말인가. 남은 두 명의 동료들의 행방을 쫒는 누나와 네코메의 여행은 이제 시작되었다.

아마사와 유코는 올 봄에 우리 학교로 전학 왔다. 전학 온 날부터 암호식이라고 불리는 흔치 않는 전뇌기술을 시연하여 순식간에 전뇌유저들의 주목을 받았다. 다이코쿠에서도 최고수준의 전뇌력을 자랑하는 다이코쿠 헤이쿠 클럽 멤버들과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서로 겨루면서, 어렸을 적에 잃은 오빠를 찾아다니며 싸웠다. 고독, 편견, 그리고 행복한 기억조차, 때로는 극복해야만 하는 적이었다. 지금 그 애의 일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애가 느끼는 갖가지 감정이 어느 일보다도 깊게 내 전뇌체에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오코노기 유코가 말했던 말을 때때로 떠올렸다. 하라켄, 아마사와를 좋아하지? 오코노기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토록 칸나와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냐면서. 칸나에게 칸나를 잊어가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기 위해서.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나도 나를 잘 알 수 없었다. 아마사와가 전학 온 날, 나는 구교사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다가 처음으로 아마사와를 보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곧게 뻗은 가는 다리, 하얀 운동화. 다가갔을 때 분명히 마주쳤던 눈이, 엇갈렸을 때는 이미 나를 보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나는 아마사와에게 사로잡혔다. 아마사와의 정체, 생활, 그 애가 내다보는 앞길까지.
나는 아마사와가 반짝버그와 암호식으로 연 저쪽세계라고 불리는 전뇌공간으로 들어가, 간절히 바랐던 칸나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남은 곧 이별이었다. 칸나와 함께 그 곳에 살고 싶은, 현실을 살아갈 의욕을 잃은 내게, 돌아올 것을 강하게 권고 받다가 끝내 질질 끌려가듯 끌고온 사람은 아마사와 유코와 오코노기 유코였다. 두 사람의 힘으로 나는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돌아오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까닭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아마사와와 오코노기가 필사적으로 나를 데려나오려고 했던 저쪽세계와 매우 흡사한 공간이었다. 혹시 같은 공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이쪽세계의 공간이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보였다. 지금은 아직 제대로 조절할 수 없었지만, 상태가 좋을 때는 이 공간을 이용해서 시간과 장소를 가볍게 넘나들 수 있었다.
이쪽세계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아마사와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사와의 고통과 슬픔과 한탄이 현실세계에 있을 때보다 직접적으로 강하게 나를 움직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사와의 감정에 공명하여, 실체가 눈물을 흘리거나 비명을 지른 것 같았다.
최근의 아마사와. 아마사와는 아주 최근에 만나기를 고대했던 오빠와 다시 만났다. 하지만 이 만남은 누나나 나의 그것과는 다르게, 아마사와를 그저 곤혹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오빠인 카지 노부히코는 아마사와의 전뇌력을 이용하여 안경으로 메가마스와 아이들을 지배하려고 했다. 아마사와는 그에 저항감을 가졌지만, 과거의 일 때문에 오빠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아마사와는 오빠인 노부히코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자신과, 오빠를 떨쳐내고 싶다는 자신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나아가 아마사와는 비밀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을 알던 사람은, 그 일을 아마사와에게 알려준 여의사뿐이었다.
아니, 눈치 챈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다.

오코노기 유코. 아마사와 유코와 같은 날 전학 온 아이였다. 안경을 잘 모르고, 전뇌력도 약해서, 처음에는 개성이 넘치는 친구들 주위에서 방글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던 여자아이가 이만큼이나 활력에 충만한 안경유저가 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특히 아마사와에 대해 시종일관 보였던 적의와 열의가 다이코쿠로 온 아마사와를 크게 움직였다. 아마사와가 너무 지나쳤을 때나 기가 죽었을 때, 대담한 도발로 아마사와를 되돌려 놓은 사람은 언제나 오코노기였다. 그리고 아마사와가 끌어안고 있는 비밀에 결연한 태도로 대한 사람도 역시 오코노기였다.
크리스마스 방과 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걸고 안경으로 최후의 결전에 들어갔다. 서로 마주보았을 때, 서로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을 오코노기는 알고 있었다. 오코노기와 함께 있을 때의 아마사와, 그리고 아마사와와 함께 있을 때의 오코노기는 서로를 꺾고 싶어서, 서로를 돌아보게 하고 싶어서, 그저 그 것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만다. 하나 밖에 없는 또 한 명의 자신이자 하나 밖에 없는 타인. 오코노기는 아마사와와와, 아마사와는 오코노기와 모든 것을 걸고 맞붙지 않는 한, 각자 앞길로 내딛을 수 없다.
두 사람의 싸움은 이어졌다. 각자의 지력과 체력과 전뇌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싸웠다. 그리고 드디어 그 때가 왔다. 그 순간 나는 소리 질렀다. 여태까지 보다 가장 크고, 아마도 가장 슬픈 목소리로.
멀리서 옅고 따스한 빛이 보였다. 저게 뭐지?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풍경, 이쪽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빛이었다. 시선을 응시하고 어둑어둑한 속을 나아갔다. 은밀한 이야기소리가 들려오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여자아이가 우뚝 서 있었다. 가늘게 뻗은 다리, 단정히 자른 앞머리 밑으로 똑바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보였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 아이에게서, 나는 나와 매우 가까운 무언가를, 매우 닮은 무언가를 느꼈다. 대체 이 아이는 누구지?

나는 잠들어 있다. 나는 깨어나고 있다.
내 전뇌체는 이곳의 온갖 감정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나만이 아니라, 아마 모든 초등학생 안경유저들이 가보고 싶을, 그리고 알고 싶을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즉 이것이다.
안경을 잃으면 우리들은 대체 어디로 가게 되는가?



제1장 미치코와 만나기 전에

바람도 구름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새도 울지 않았다.
나 오코노기 유코는 신교사의 옥상에 서 있었다. 건너편 구교사의 옥상에는 아마사와가 있었다. 우리들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아마사와는 눈 깜빡임조차 하지 않았다. 내 호흡도 멈춰 있었다. 우리들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일 분 전의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마사와는 정지해 있었다. 나를 향해 쏘려고 했던 미사일을 붙잡은 채로 말이다. 지금의 정적과 다른 점은, 그 때 아마사와의 얼굴이 번민에 일그러져 있었다.
드디어 온 것이다. 아마사와의 괴롭고 슬픈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아팠을까. 괴로웠을까. 안경이 끝나버린 때란 어떤 느낌이었을까.
난 개조태그를 숏컷에 집어넣었다. 손가의 키보드로 프로그램을 불러냈다.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 때가 그 순간에 와버린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나와 아마사와가 서로 원했던 것, 극복하려고 했던 것, 싸움이라는 형태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 거기에는 하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 앞에 엔터키가 있었다. 마지막이었다. 키를 누르려고 나는 검지를 들어올렸다.
[하지 마.]
가챠기리가 있었다. 아마사와와 같은 구교사의 옥상 위였다. 숨이 거칠었다. 트레이드마크인 군모가 굴러 떨어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살짝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쏘지 마, 야사코.]
가챠기리가 전뇌빔을 발사하는 자세로 조준을 내게 향했다.
[그 키를 누르면 너를 쏘겠어.]
가챠기리는 진심이었다. 전뇌력이 높은 가챠기리가 다른 친구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은 없었다. 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챠기리가 전뇌력으로 치면 어른과 애 수준이나 차이가 나는 나를 노리고 있었다.
[지금 이사코를 쏘면 안 돼. 네 공격을 받으면 이사코는 치명상을 입게 될 거야. 왜냐하면 이사코는 이미...]
[그만해.]
아마사와가 가로막았다. 그 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말하지 말라는 의지가 물씬 풍기는 목소리였다.
틈이 있었다. 하나, 둘. 갑자기 내 목 깊숙한 곳에서 간지럽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웃었다. 왜? 이제 와서 그것을 말하려고 한 가챠기리가 우스워서? 아니면, 그 때를 앞에 두고, 드디어 여기까지 끝을 볼 수 있다는 행복감 때문에?
가챠기리가 크게 눈을 떴다.
[야사코, 너... 설마...]
응,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렇군. 알고 있었군.]
[그만하라고, 가챠기리!]
이번에야말로 아마사와가 외쳤다. 하지만 가챠기리를 더이상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이사코의 안경은 이미 끝이...]
국도 쪽에서 빠앙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마사와 유코를 쏘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아마사와도, 가챠기리도.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나는 꾹 눈을 감았다. 다음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꺾고 웅크린 아마사와였다.
아마사와. 다가가려고 하다가 여기가 아마사와와 다른 건물의 옥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가간 것은 가챠기리였다. 가챠기리가 아마사와에게 무슨 말을 했다.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웅크렸던 아마사와가 약간 얼굴을 들더니 가챠기리에게 무슨 말을 속삭였다. 그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가챠기리가 끄덕이고, 아마사와를 어깨로 지탱하며 일어났다.
아마사와가 나를 보았다. 그 때의 아마사와의 얼굴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사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아주 살짝 입가를 올린 아마사와의 얼굴은 매우 예쁘고 상냥했다. 갑자기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마사와!]
아마사와는 이미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 끝까지 달려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펜스를 붙잡았다. [아마사와!]
가챠기리에게 부축을 받은 아마사와는 구교사 계단 입구로 모습을 감추었다.
[야사코.]
탁탁탁 몇 개의 발소리가 나며 후미에네들이 옥상으로 달려올라왔다. 오늘 나와 아마사와가 일대일 승부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비밀로 했다. 딱히 숨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나와 아마사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미에네들은 눈치 채고 있었다. 후미에, 야마다 유키노, 아키라, 그리고 다이치, 나멧치, 덴파의 헤이쿠멤버들. 다들 우리들이 하려는 일을 알고 잠자코 관전해주었다.
[야사코.] 어깻숨을 쉬며 후미에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 망설였나보다. 혼란스러운가보다.
[이거, 네가 이긴 거야?]
결국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나멧치였다.
[그치 뭐. 야사코랑 이사코의 승부에서 이사코가 무릎을 꿇었으니까, 이사코는 패배를 인정한 거야.]
[나멧치, 진짜 못됐어.] 유키노가 말했다. 유키노의 목소리는 흥분과 슬픔에 갈라져 있었다. [이런 때 누가 이기고 졌는지가 그렇게나 중요해?]
[미안.]
나멧치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멧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심정이 뼈저릴 정도로 잘 와 닿았다. 승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멧치 역시 승패에 신경 쓸 겨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나고 내게 다가왔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그 사실에 대해 어느 누구도 말할 용기가 없었다.
[언제 알았어?]
기나긴 침묵 뒤 입을 연 것은 역시 후미에였다.
[이사코의 안경이 끝났다는 거 말이야.]
그 말을 하자 모두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이제 인정해야만 한다. 그 때를, 우리들과 매우 가까운 사람이 안경의 끝나는 때를 맞이하고 말았다는 것을. 그것이 아마사와였다는 것을.
[왜 말해주지 않았어?]
후미에의 말은 도중에서 혼잣말처럼 되어있었다. 울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마사와의 안경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들, 그 사실을 말로 들었다고 한들 자신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버스무덤에서 큐브를 쓰러트린 날 밤에 알았어.]
나는 이야기했다. 나와 아마사와는 버스무덤에서부터 전뇌체가 거의 불안정해졌던 쿄코를 교대로 업고 둘이 함께 집까지 돌아갔었다.
그날 밤 아마사와는 우리 집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전뇌펫 덴스케의 상태가 나빠져서 우리들은 복구의 단서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출입금지상태였던 할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기서도 덴스케를 치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재는 매우 안정된 공간이어서, 아마사와는 응급처치로 덴스케를 치료캡슐에 넣었다. 아마사와는 캡슐을 보고 집중치료실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따스하고 듬직한 목소리로 <당분간 여기서 쉬어라.>하고 캡슐속의 덴스케에게 말했다. 일어난 아마사와에게 <열쇠를 채우지 않아도 될까?>하고 묻자, <열쇠?>하고 의아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이 캡슐에 말이야.> 거듭 묻는 내게 아마사와는 <필요 없을 거 같은데.>하고 매몰차게 말했다. 나는 방을 나가려고 하는 아마사와의 등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깨달았다. 여러 가지 장면의 아마사와가 고속 슬라이드 쇼처럼 휙휙 연속되어 떠오르고, 마지막 한 장에서 아마사와가 덴스케가 들어간 캡슐의 열쇠를 눈치 채지 못했던 모습까지 도달했을 때, 지금까지의 아마사와가 했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몇 가지의 행동이 깨끗하게 이어져 깨달았다.
아마사와에게는 자물쇠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안경유저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크게 경고표시가 되어있던 자물쇠가 말이다. 아마사와의 안경은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사코 누나가 가장 처음이라니.]
아키라의 짜내어 말한 목소리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 이사코 누나잖아요? 다이코쿠 초등학교에서, 아니, 다이코쿠 초등학교뿐만이 아니라, 다이코쿠의 모든 초등학교에서도 톱을 다툴 정도의 안경유저잖아요? 다이치 형도 우리 누나도 대단하지만, 암호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사코 누나를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 사람에게 누구보다도 먼저 끝이 나다니요.]
[그래서 먼저 온 것일 수도 있어.]
다이치가 낮게 말했다.
[녀석의 안경능력은 일반 유저의 수준을 초월했어. 그러니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빨리 끝이 나도 이상할 거 없어.]
나는 모두가 결코 입에 담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나한테 화나지 않았니?]
참지 못하고 스스로 꺼냈다.
[아마사와의 안경이 끝나가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마사와와 싸웠잖아? 마지막에는 막으려고 했던 가챠기리를 뿌리치면서까지 쐐기를 박았어. 내가 나쁜 년이야. 내가 했지만 정말 화가 나. 진짜 비겁하고 진짜 못 됐어. 난 나쁜 년이야.]
[아냐.]
뭉클하고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덴파였다.
[아마사와는 아마도 아주 기뻤을 거야. 아마사와는 즐거워 보였어. 너랑 비슷할 정도로 즐겁게 웃었던걸.]
[웃을 리가 없잖아. 우린 싸움을 했다고.]
목소리를 거칠게 하며 되받아친 나멧치에게 풀이 죽으면서도 덴파는 [하지만 정말로 그랬던걸.] 하고 더욱더 강하게 저항했다.
[나도 덴파의 말에 동감이야.]
매우 큰 목소리로 다이치가 말했다.
[이사코는 자신의 안경이 끝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어. 걔 정도의 안경유저가 그런 것을 모를 리가 없잖아. 그렇다는 말은 그 이후로 한 이사코의 행동은 모두 안경의 끝을 염두에 두었던 거였어. 우리들을 불러서 메타버그 채집을 하러 간 것도, 야사코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도 전부 다. 야사코는 비겁하지 않아. 야사코는 나쁜 짓을 한 게 하나도 없어. 이사코는 스스로 선택한 거야. 상대가 야사코니까.]
[아마사와를 조종한 사람은 걔 오빠였어.]
참을 수 없어져서 말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내 이야기에 다들 침묵하고 귀를 기울여주었다.
[아마사와의 오빠는 계속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아마사와를 시험했어. 자신을 위해서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아마사와에게 무모한 허들을 넘도록 강요했어.]
[그게 뭐야.] 마음 깊숙이 분개한 듯 유키노가 말했다. [그 자식 뭐야, 진짜 오빠 맞아?]
[노부히코라는 사람이구만.] 다이치가 말했다. [카지 노부히코.]
나는 끄덕였다. 메과자점 습격을 계획한 주모자였다.
[그 후로 다함께 조사했어. 의외로 간단하더만. 메가마스 사원이라는 단서가 있었으니까. 예상한 대로 카지 노부히코는 네코메 소스케의 작문에 나오는 사인조 중 한 명이었어. 프로토타입 안경을 받은 네 명 중 한 명이지.]
[난 그런 사람을 위해서 아마사와가 희생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걔 오빠 대신에 아마사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전혀 몰라서 망설이다가, 아마사와의 안경이 끝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결투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우리들은 안경의 힘을 마지막까지 짜내서 전력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말하면서도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 다시 한 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마사와의 안경의 끝을 앞당긴 것이 아닌가. 내가 아마사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결투 말고도 다른 뭔가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역시 아냐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나로서는 이것밖에 할 수 없었어.]
말을 끝내고, 결국 참지 못하고 커다란 눈물을 한 방울 뚝 발아래의 콘크리트에 떨어트렸다.
그토록 온몸을 찢는 통증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옥상을 떠났을 때, 어깨를 빌려준 가챠기리가 [괜찮아 보이는군.] 툭 말하며 몸을 떨어트렸다. 나 아마사와 유코는 끄덕이고는 천천히 혼자서 걸었다. 가챠기리는 말을 걸지도 불안한 표정을 보이지도 않고, 약간 떨어져서 양손을 카키색 점퍼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나를 따라왔다. 매우 자연스럽고 내키는 대로의 발걸음이 나를 안심시켰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물으면 당황했을 것이다. 내가 갈 곳 따위는 없었다. 지금의 내게는 더 이상 가야만 하는 곳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 끝났다. 옥상에서의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눈앞에 빛이 날이들고, 고통과 충격이 온몸을 꿰뚫었다. 순간, 아아, 이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안경을 잃는구나.
하지만 아무래도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충격은 분명 안경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뇌력은 남아 있었다. 내 전뇌력은 다 꺼져가는 등대의 빛처럼 몸속에서 작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몸속의 작은 촛불의 열기에 의지하며 걷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혼잣말처럼 질문이 흘러나왔다. 조금 떨어져서 걷던 가챠기리가 등 뒤에서 대답했다.
[글쎄다. 네가 병원에서 진찰받았을 때 나랑 아키라가 너를 미행했었지. 기억하냐?]
기억한다. 오빠와 다시 만났던 날, 오랫동안 내게 지시를 내려왔던 목소리가 오빠였다는 것을 안 날이었다. 그 날, 가챠기리는 오코노기 유코와 헤이쿠에게 부탁을 받아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내가 목소리와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다. 하지만 가챠기리는 오히려 나를 배웅해주었다. 다이치네들의 부탁을 어겨가면서까지.
<서두르는 편이 좋지 않겠냐?>
가챠기리는 말했다.
<모처럼 만날 수 있는 기회라면 더더욱 서둘러야지.>
[그 때 너는 나와 아키라를 뿌리치려고, 자기가 병원이 아니라 폐건물로 가고 있다는 거짓 내비게이션 정보를 흘렸어. 하지만 넌 모두 지웠다고 생각했겠지만, 병원으로 가는 길이 하나 고스란히 남아있었지. 그래서 난 네가 어디로 가는지 단번에 알았어. 루트를 까먹고 안 지운다는 것은 너로서는 지나치게 평범한 실수야. 이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생각한 대답이...]
[루트를 깜빡 잊고 안 지운 게 아니야,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던 거지.]
내 뒤에서 가챠기리가 끄덕이는 게 눈이 선했다.
[보이지 않으니 못 지웠다? 그럼에도 나는 믿을 수 없었지. 아무래도 그냥 실수한 거 아닐까, 하고 말이야. 나는 네 안경이 끝나간다는 생각을 애써 부정하려고 했어. 왜냐면 그건 너무하잖아. 열세 살 생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끝나다니. 너한테 안경이 끝나간다고 알려준 사람은 시우 선생님이냐?]
나는 끄덕였다. 전뇌공간에 닿았을 때에 느꼈던 집요한 두통과 안경을 꼈을 때 나타나는 시각장애, 그것은 전형적인 안경이 끝날 때 보이는 증상이라고, 그 날 시우 선생님으로부터 선고를 받았다.
[네 이마고와 관계있냐.]
[몰라.]
[넌 이마고를 쓸 수 있지?]
이마고. 키보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안경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분명히 내게는 그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능력 때문에 안경의 끝이 다른 사람보다 빨리 온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어깨를 손으로 꾹 억눌렀다. 거기에는 예전에 반짝버그를 집어넣었을 때 사용했던 암호로(暗號爐)가 있었다. 암호로는 이마고와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암호화된 명령어가 직접 전뇌공간에 작용한다. 안경은 전뇌공간을 간섭하는 장치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이마고만 있으면 안경이 없어도 전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셈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안경 없이도 이마고, 혹은 이마고처럼 보이는 것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쿄코였다. 오코노기 쿄코. 오코노기 유코의 여동생.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가챠기리가 중얼거렸다. 제정신이 든 나는 황급히 가볍게 쥔 오른손의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귀에 대고 통화했다. 손가락전화는 아직 작동했다.
<유코야.>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뇌에 흘러들어왔다.
[오빠.]
<가장자리랑 체크 중에서 어느 쪽이 좋은 거 같냐?>
[어?]
[아, 목도리 디자인 말이야. 쓰던 게 벌써 너덜너덜해져서 새 것을 사려고 하거든. 그래서 보고 있는데 마음에 드는 게 두 개가 있어서.>
[그게 가장자리랑 체크야? 무늬 말이지?]
<어. 네 의견을 듣고 싶어서 계속 기다렸는데 최근에 전혀 방에 오지도 않으니까 내가 먼저 전화했다. 이거 뭐로 해야 좋을까. 가장자리만 무늬가 있는 목도리는 세련되지었지만 색이 좀 수수해. 체크무늬는 색감이 좋은데 좀 어려보이고.>
눈꺼풀의 뒤가 뜨거워졌다. 난 이걸 하고 싶었구나.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어. 오빠랑.
<그런데 오코노기 유코의 안경은 파괴했어?>
확 어조를 바꾸며 오빠가 물었다.
<내가 오코노기 유코의 안경을 박살내라고 했었지. 할 수 있겠어?>
오빠에게는 오늘 결투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결투는 나와 오코노기 유코에게 있어서 매우 신성하고 소중한 두 사람만의 의식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설령 오빠라고 할지라도.
[응. 해볼게.]
가볍게 거짓말이 나왔다. 말하고 나서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 오빠.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야. 나는 아마도 오빠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오빠한테 한 가지 좋은 정보가 있어.>
오빠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메가마스가 곧 공간관리실과 짜고 거대 프로젝트를 실행한다는 거, 기억해? 거기에 대해서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얻었어. 코일코일스라고 알지? 안경을 처음에 개발했던 기업 말이다.>
알고 있었다. 프로토타입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네 명의 모니터요원에게 넘겨졌다. 오빠와 하라카와 타마코라고 사람도 모니터요원이었다.
<이벤트회장에서 사고가 터진 것 때문에 코일코일스는 도산했고, 코일스의 기술은 모두 현재의 안경회사 메가마스로 넘겨졌어. 하지만 코일스가 절대로 넘기려고 하지 않았던, 아니 그 존재조차 숨기려고 했던 자료가 있었다는군. 메사마스도 그 존재를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접속할 수 없어서 몇 년이나 애를 먹고 있었다네?>
[접속...? 그럼 자료가 전뇌공간에 숨겨져 있다는 거야?]
<그래. 그게 코일도메인이야.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저쪽세계의 비밀창고지.>
[코일도메인.]
나를 배려해주듯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우뚝 서 있던 가챠기리가 나를 보았다.
코일도메인. 눈앞으로 어떤 정경이 떠올랐다. 크게 검은 입을 벌렸던 통로. 내가 열었던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 그 세계는 코일도메인이라고 하는 공간으로 이어져 있던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 그토록 중요한 자료가 잠들어 있던 것인가.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오빠와 만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공간에.
[내가 낡은 공간에서 그 자료를 찾아야하는 거야?]
<아니. 조금 달라. 코일스의 자료는 있다고 소문만 있을 뿐이었으니까. 나는 네가 저쪽세계로 자유자재로 오가서 안경유저들을 쥐고 흔들어야하는 게 더 중요해. 그 방법을 조사하다가 찾게 된 부수입 같은 정보일 뿐이지.>
오빠의 목소리에서 운율이 느껴졌다. 오빠의 열을 조금 식히게 하려고 굳이 말해보았다.
[그것이 얼마나 깊은 공간인지 모르겠지만 메가마스 정도의 기술력이면 금방 찾아서 접속했을 것 같은데. 코일도메인은 이미 메가마스가 입수하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더라고. 메가마스에서 그 조사를 하던 연구자가 급작스럽게 사망했어. 그 사람이 죽음과 동시에 빛을 보려던 코일도메인은 다시 묻히고 말았지. 추후조사에서 입구가 코일스 본사가 있었던 곳 근처에 있다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조사는 진척되지 않았더군.>
[그야 그렇겠지. 코일도메인이 저쪽세계의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면, 안경 없이 접속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말하는 나는 이미 안경을 잃어가고 있는데.
<그럼, 물론이고말고, 유코야.>
오빠의 목소리가 나를 떠보려는 듯 달콤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연구원 오코노기의 데이터에는, 어떤 전뇌공간을 실험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것을 메가마스 사람들은 누구도...>
잠깐만. 오코노기라고?
<만약 그 공간이 코일도메인이라면... 그 사람은 어딘가에 그 기록을... 육십을 넘긴 고령의 연구자가 접속... 그렇다면 직접 그 공간에 접속하는 방법이 분명...>
오빠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빠는 점점 말이 빨라졌다.
내 머릿속으로 어떤 배경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아담한 일본풍의 서재. 오코노기 유코의 집에 묵었던 날 밤에 덴스케의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들어갔던 오코노기 유코네 할아버지의 방이었다.
그 방은 완전히 안정되어 있었다. 갖은 전뇌상태가 흔들리지 않고 평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곳에 덴스케를 데려가자마자 복구불능이었던 덴스케의 상태가 미미하게나마 회복할 정도였다.
갑자기 번뜩였다. 덴스케다. 전뇌적인 복구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던 의미 불명의 암호가 압축되어 있었던 그 목걸이.
<여보세요? 유코?>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제정신이 들었다.
[미안. 괜찮아. 다 듣고 있어.]
황급히 대답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온몸으로 피가 돌았다. 흐른 피가 열을 띄며 내 뺨을 상기시켰다. 잠깐 틈을 두고 오빠가 뒤를 이었다.
<알겠니? 그 방법만 찾으면 우리들은 반짝버그 없이도 저쪽세계 속에 있는 비밀의 공간, 코일도메인에 접속할 수 있어. 메가마스의 누구보다도, 아니, 전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빨리 말이야.>
오빠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보내달라고 한 뒤 손가락전화를 끊었다. 가능한 침착한 목소리로, 알았어, 나도 알게 된 사실이 있으면 바로 오빠한테 연락할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통화를 끝마쳤다.
전화를 끊고 잠시 뒤에 오빠로부터 자료가 도착했다. 어플리케이션이 열릴지 걱정되었지만 제대로 열렸다. 좋았어, 안경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있어. 나는 보내진 정보를 훑어보고 얼굴을 들었다.
기다리다 지쳤는지 가챠기리가 어이구야 하듯 앉아있던 가드레일에서 일어났다.
[가챠기리, 그만 가 봐. 난 괜찮으니까.]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가챠기리가 웃었다. 전혀 나를 믿지 않았다. 나도 내가 한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다고? 대체 뭐가? 나는 안경을 잃어가고 있었다. 즉 오빠에게 있어서 내 이용가치가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방금 전까지 악물었던 말을 마음 속에서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내게는 더 이상 갈 곳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안경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해야만 한다.
[갈 곳이 생겼어. 이제부터는 나 혼자 행동할 거야.]
가챠기리는 내게서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몇 번이나 나는 괜찮다고 말하면, 몇 번이고 그[알았다.]라고 말하면서, 가챠기리는 내 뒤를 계속 걸어서 따라왔다. 한 번 멈춰 서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아까처럼 흥 하는 코웃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따로 볼일이 있어서 갈 길을 가는 중인데 떫냐? 라고 하듯이.
그래서 포기하고 그냥 가기로 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가챠기리는 중간부터 안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느 사이엔가 우리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메과자점으로.
[허이구야.]
나를 맞아준 것은 가게 앞에서 낙엽을 쓸어 모으고 있던 주인이었다.
[또 왔구먼. 자, 자자. 들어오거라. 추웠제? 딱 잘 되었구나. 차를 마시며 숨 좀 돌릴까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느뇨. 어여, 들어오너라.]
나는 끄덕이고는 깨끗하게 먼지가 제거된 문턱에 걸터앉았다. 가챠기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가게 밖의 덧문을 넣어두는 곳 근처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해서 조금 웃고 말았다. 거기에 매여, 쇼핑을 하러 가게로 들어간 주인을 기다리는 의젓한 개 같았다.
[할머니.]
[메가옹이라고 부르거라.]
그것이 할머니의 호칭인가.
[메가옹. 부탁이 있어요.]
[호호오. 들어보고, 내 해줄 수 있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쿄코를 불러주세요. 덴스케랑 함께요.]
메가옹은 [응?]하고 눈썹을 움직였다.
[오코노기네에 직접 가기에는 전... 미움받고 있어서요. 메가옹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어요.]
메가옹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나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고 귀찮게 여기는 것도 아니라, 그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이윽고 메가옹은 얼굴을 돌리고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다음에 나타났을 때는 메가옹 뒤로 여전히 장난감 안경을 쓰고 캡슐에 든 덴스케를 끌어안은 쿄코와 함께였다.

[유타카 언니!]
헤죽헤죽 웃는 얼굴로 캡슐을 내던지며 쿄코가 내게 달려들었다.
[또, 옹!]
메가옹이 대던져진 캡슐을 어이쿠 하며 판매용 수제 안경을 쓴 메가옹이 받아들었다. 나는 배에 달라붙은 쿄코의 얼굴을 양손으로 살짝 감쌌다. 쿄코는 부드럽고 따스했다. 손을 떼고 허리를 숙이며 시선을 마주했다.
[덴스케를 빌려가도 될까?]
덴스케를? 의아한 듯 쿄코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덴스케를 치료할 방법을 찾았거든.]
[정말?]
나는 끄덕이며 메가옹에게 다가갔다.
[덴스케를 제게 맡겨주세요.]
다시 뜸을 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곧 바로였다. 메가옹은 손에 든 덴스케의 캡슐을 자연스럽게 내게 건넸다.
[안타깝지만 내게는 그 아가 보이지 않는구먼. 숫자와 프로그램으로밖에 볼 수가 없거늘.]
지금의 나와 비슷할 것이다. 나는 아직 간신히 전뇌개의 모습으로 볼 수 있었지만, 곧 덴스케를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개는 메가옹네 집주인님이 만드신 건가요?]
메가옹에게 물었다.
[그렇느뇨. 메가마스가 개발한 실험 작품이었던 전뇌펫을 영감이 개량했지. 그 개를 유코의 생일에 선물한 것이거늘.]
그렇군. 역시 그 서재의 주인인 메가옹의 남편은 메가마스의 개발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개량한 프로토타입 전뇌펫을 오코노기 유코에서 선물했다. 받아든 캡슐 안의 덴스케에게 시선을 응시했다. 목걸이가 간혹 방전하듯 푸르스름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암호가 압축되어 있었다. 내 상상대로라면 이 전뇌개야말로 메가옹의 남편인 연구자가 접속했던 실험공간으로 가는 열쇠였다.
[쿄코. 덴스케를 내게 맡겨줘.] 다시 한 번 말했다. [덴스케를 치료할 수 있는 곳이 있어. 그곳에 가면 덴스케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거야. 메가옹,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요.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게요. 덴스케를 함부로 대하거나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쿄코가 양손을 뻗었다. 내가 끌어안던 캡슐을 자신의 체온을 전하듯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유카타 언니. 부탁해.]
나는 끄덕였다. 캡슐을 다시 끌어안고 발길을 돌렸다. 걸어가려고 했다.
[잠깐 기다려라.] 메가옹의 목소리였다. [담보는 무엇이냐?]
담보. 덴스케를 빌리기 위한 비용 말인가.
[죄송해요. 뭔가 드리고 싶지만, 제게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이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가게에서 쓸 수 있는 화폐는 메타였다. 하지만 다 부서져 가는 내 안경에는 단 1메타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너다.]
갑자기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들자 싱글벙글 나를 보는 메가옹의 얼굴이 있었다.
[담보는 바로 너이거늘.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너라.]
메가옹의 눈꼬리의 주름이 확 늘었다. 메가옹은 웃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그곳에 갔다. 오빠가 전송한 정보에는 코일도메인으로 가는 입구가 있는 곳의 후보지가 있었다. 쫙 나열된 장소를 훑어보고 바로 그곳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잘 아는 곳이었다. 몇 번인가 가서 일리걸을 몰아넣고 반짝버그를 추출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메가마스 자회사의 공장으로, 메가마스가 그 일부를 일시적으로 자사의 연구시설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후보 리스트에는 그밖에도, 메가마스가 지금의 새 사원주택으로 옮기기 전의 본사건물터, 카야노 신사, 다이코쿠 초등하교까지가 열거되어 있었지만, 내게는 그곳 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 남쪽에 있는 폐공장 말이다.
나는 전에 오코노기 유코와 함께 내가 설치한 암호식의 암호에 걸려 그 공장의 지하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 때에 맛본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초조함을 불러일으키는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이었지만 신기한 소녀를 보고 등골이 얼어붙은 적이 있었다.
그곳이다. 틀림없다. 하지만 덴스케를 끌어안고 당차게 도착한 폐공장에서 아연실색하여 우뚝 섰다. 나와 오코노기 유코가 갇혔던 지하에서 전뇌세계를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전에 내가 헤이쿠 녀석들과 열심히 적어 넣었던 암호식은 아직 희미하게 남아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단순히 오래된 낙서로 변해버렸다. 모든 것이 빈약하고, 먼지투성이에 바랜 환경이었다. 이곳이 아니야. 절망에 아찔해져 잠시 멍하니 우뚝 섰다. 내 착각이었나.
그 때 끌어안던 캡슐 안의 덴스케의 목걸이가 희미하게 반응했다. 아주 미미했지만 점멸했다. 틀림없다. 역시 여기였어. 이 지점은 아니더라도, 이 근방에, 이 공장 안에, 저쪽세계, 코일도메인으로 가는 입구가 분명히 있다.
<이사코가 사라졌어.>
가챠기리로부터 나 오코노기 유코에게 전화가 온 것은 잡동사니점에 있었을 때였다. 바로 집에 돌아갈 기분이 들지 않았던 우리들은 잡동사니점의 테라스에서 따뜻한 캔커피와 캔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눈을 떼지 않으려고 했는데 메과자점에 들어가길래 방심했어. 난 밖에서 기다렸는데 이사코가 메가옹이나 쿄코랑 약간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나보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기에 그 말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십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아차 싶었어. 가게에서 이미 이사코는 사라져있었고.>
[잠깐만. 메과자점이라고? 메과자점에 아마사와가 갔었어?]
내 목소리에 후미에, 유키노, 다이치네 헤이쿠네가 일제히 돌아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메가옹하고는 안면식이 있었나봐.>
이럴 수가. 나는 이중으로 충격을 받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아마사와를 걱정하는 사이에, 당사자인 아마사와가 내가 없는 메과자점에 갔다는 것과 우리 할머니 메가옹과 아마사와가 서로 알고 있었다는 것. 메가옹도 아마사와도 내게 그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메가옹에게 물어봤더니, 메가옹은 잊은 척하면서 얼버무렸지만 아마 안방 옆의 툇마루를 통해 나간 거 같아.>
[어디로 갔어?]
<모르겠어. 메가옹도 그것까진 모르는 듯했어.>
[그럴 수가.]
후미에가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래서 이사코의 몸 상태는 어땠어? 안경이 끝장나고 나서 어떻게 되었어?]
가챠기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하듯 내게 재촉했다.
<괜찮아 보이더군.>
후미에의 목소리가 직접 전해진 모양이었다. 내가 전할 것도 없이 가챠기리가 대답했다. 나는 바로 음성모니터를 전체모드로 바꾸었다.
<아니, 괜찮은 것은 아니지만... 안경이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어. 아슬아슬 살아있더군.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야.>
가챠기리의 말에 모두가 무겁게 침묵했다.
[짚이는 데는 없냐? 어디로 갔다거나, 뭔가 수상한 낌새 같은 힌트 말이야. 엉?]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졌는지 다이치가 고함쳤다.
<힌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메과자점에 가기 전에 이사코가 지 오빠와 전화통화했어.>
카지 노부히코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황급히 물었다.
<저쪽세계에 반짝버그가 없어도 접속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 코일도메인이라고 했던데...>
[코일도메인?]
<그 전화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아마사와가 갈 곳이 생겼다고 했어.>
[그게 메과자점이었어?] 후미에가 확인했다.
<메과자점에서 사라진 것은 이사코 뿐만이 아니야. 이사코는 쿄코한테서 덴스케가 들어있는 캡슐을 건네받았어. 치료할 수 있는 곳이 있대.>
틀림없다. 아마사와는 저쪽세계로 간 것이다. 코일도메인이라고 불리는 전뇌공간으로.
[입구야.]
다이치가 딱 잘라 말했다.
[이사코가 저쪽세계에 있는 코일도메인이라고 하는 공간으로 향했다면, 그 공간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야. 이사코는 분명 그곳에 있어. 입구를 찾자.]
가챠기리, 후미에, 덴파, 나멧치, 아키라에 유키노까지, 그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차례로 말했다. 폐건물, 카야노 신사, 역 남쪽의 개발지역, 노즈치 신사, 다이코쿠 초등학교,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있는 잡동사니점에서 서쪽에 펼쳐져 있는 전뇌불안정지대...
우리들은 나뉘어서 그곳들로 가보기로 했다. 나는 후미에와 폐공장으로 향했다. 폐공장은 넓었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전부 수색할 수 없을 것이라며 다이치가 후미에를 붙였다.

폐공장까지 달려갔다. 평소에는 이야기하다보면 금방 도착하고 말았을 그곳이 오늘따라 유달리 멀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초조했다.
간신히 평소에 사용하는 입구, 정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안경놀이를 하려고 사용하는 뒷구 에 도착했고, 비틀려 열려진 유자철선 사이로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떡하지? 같이 돌아볼까?]
유자철선에 긁힌 손등을 날름 핥으면서 후미에가 물었다.
[흩어지자. 너는 사무소가 있는 건물과 테니스코트를 찾아봐. 나는 공장으로 가볼게.]
[공장건물은 상당히 넓어. 지하도 있으니까. 혼자서 괜찮겠어?]
[괜찮아. 몇 번이나 와봤으니까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어.]
알았어. 후미에가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렇게 우리들은 바로 헤어졌다. 후미에는 공장 안의 사무실을 향해 달렸고, 나는 공장을 향해 왼쪽으로 꺾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짚이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아마사와가 우리 집에 묵었던 날의 일이었다. 우리들은 상태가 악화된 덴스케를 복구하기 위해 메가옹이 닫아놨던 할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갔다. 그 때의 신기한 느낌, 모든 것이 안정되어 온화하게 유지되어 있던 느낌을 떠올렸다. 고급실험실 같은 방이었다. 할아버지는 메가마스에서 근무했었다. 비상근으로 시민병원에도 출근하던 직원이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사와가 덴스케의 캡슐을 가지고 간 곳은 그 서재와 매우 닮은 곳이 아닐까. 즉 생전의 할아버지가 연구를 위해서 종종 출입했던 곳 말이다.
물론 그것이 이 폐공장에 있다는 근거는 없었다. 나는 손가락전화를 열어 메가옹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적에 폐공장에서 무슨 연구를 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메가옹이 아마사와의 행선지를 모르더라도, 할아버지가 했던 일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귀에 댄 채 메가옹이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렸다.
덴스케가 반응했다. 목걸이가 점멸했다. 나 아마사와 유코는 덴스케가 들어있는 캡슐을 끌어안은 채 주위를 응시했다. 그 방은 공장건물의 1층 안쪽에 있었다. 창문이 없었는데, 아마 옛날에는 기계실로 썼을 것으로 보인다. 먼지와 낡은 기계기름냄새가 났다. 낡은 책상, 어디와도 연결되지 않은 통신기기, 배전반과 망가진 회전의자. 덴스케의 목걸이를 반응시키고 있는 것은 어디에 있지?
방 구석구석까지 확인하고, 배전반의 옆의 밖으로 튀어나온 네모난 기둥 측면에 낙서 같은 기호를 발견했다. 뭐지? 전뇌펜으로 쓰인 기호였다. 하지만 판독할 수 없었다. 일부의 영상이 격렬하게 휘저어진 것처럼 벗겨져서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보였다. 악에 받쳐, 포기할 수 없어서, 손가락으로 기호를 만지려고 했을 때였다. 덴스케의 목걸이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나왔다.
둘러보자, 그 기호의 밑 부분의 바닥에 크게 사각형으로 토막 난 부분이 보였다. 황급히 양손으로 패인 부분을 더듬었다. 손잡이를 발견했다. 양손가락에 걸고 온몸의 힘을 넣어 바닥을 들어올렸다. 후욱 차가운 공기에 무심결에 어깨를 움츠렸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발밑의 어둠을 응시했다. 지하실이었다. 나와 오코노기 유코가 갇혔던 곳과는 다른 지하층으로 이어져 있었다.
목걸이의 점멸이 한층 격해져 있었다. 여기다. 이곳이 입구였다. 나는 캡슐을 다시 끌어안고 지하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계단을 더듬으며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내려갔다. 계속 닫혀있던 곳이었는데도, 곰팡내가 나지 않았고 먼지투성이이지도 않았다. 오코노기 유코의 집에 있던 서재처럼 안정된 조용함만이 존재했다. 조명도 없었는데 희미하게 밝은 것 같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닥에 전뇌안개가 뒤덮여 흐르고 있었다.
틀림없다. 이곳이야말로 메가옹의 남편, 오코노기라고 하는 연구자가 숨겨놓은 연구시설이다. 즉 저쪽세계, 코일도메인으로 가는 입구였다.
나는 손가에 키보드를 열었다. 제대로 될지는 불안했지만 간신히 보였다. 두통이 다시 심해졌다. 옥상에서 싸운 뒤 가라앉았는데, 전보다 몇 배나 되는 아픔에 괴로웠다. 이마에 땀이 배었다.
덴스케는 캡슐 안에서 꾹 눈을 감고 있었다. 괜찮아. 곧 끝날 테니까. 나는 말을 걸었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덴스케만큼은 치료하겠어.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떠오른 도움말에 따라 암호를 입력했다. 암호는 오빠에게서 건네받은 자료 속에 그럴싸한 단어장을 보고 확신이 가는 암호가 있었다.
제발 열려라. 엔터키를 눌렀다. 그러자 지하실 전체를 빛이 감싸며 몇 개의 일그러진 모양의 전뇌기계가 출현했다. 치료장치다. 나타났다.
서둘러 캡술을 열어 덴스케를 그것들 사이에 살짝 두었다. 덴스케는 짖거나 날뛰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누워있었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을 때였다. 한층 밝은 광선이 천장에서 모이며 덴스케에게 똑바로 내리쬐더니, 덴스케의 위로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열쇠가 떠올랐다.
나는 열쇠에 손을 뻗어 천천히 쥐었다. 괜찮아. 아직 조금 더 할 수 있어. 덴스케의 목걸이에는 열쇠구멍이 달린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나는 손에 쥔 열쇠를 천천히 그곳으로 찔러넣었다.
[윽.]
무심결에 목소리가 나왔다. 오른손에 여태까지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신비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았는데, 내 의지에 반하며 손이 제멋대로 격렬하게 진동했다.
침착해. 유코, 침착해. 강하게 되새기면서 열쇠에서 신중하게 손을 떼었다. 방 전체를 감싸던 빛이 부드럽고 따뜻한 색으로 바뀌었다. 덴스케의 전뇌체를 뒤덮던 문자화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원래대로의 하얗고 폭신폭신한 털로 돌아갔다.
해냈다. 덴스케가 치료되고 있다. 무심결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것으로 쿄코와의 약속은 지켰다. 오코노기 유코에게도 덴스케를 무사히 건네줄 수 있어. 이제 미련은 아무 것도 없어.
양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 잠시동안 멍하니 아무 것도 없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변에 눈치 챈 것은 조금 지난 뒤였다. 덴스케의 몸이 원래 상태로 돌아갔는데도 장치에 계속 반응했다. 이상해. 반응이 계속되면 덴스케는 이 공간에 녹아버릴 것이다. 상태를 확인하려고 다가가자 덴스케가 흩어져가는 것이 보였다.
반짝버그였다. 정수리에서 등골로 충격이 꿰뚫었다. 덴스케 자체가 반짝버그로 되어있었다. 설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런 식으로 반짝버그의 덩어리가 있었다니. 아니, 무엇보다도 덴스케라고 하는 이름의 전뇌개야말로 저쪽세계를 여는 열쇠였을 줄이야.
나는 장치의 사이에 있는 덴스케를 꺼내려고 했다. 당장 꺼내지 않으면 덴스케를 고치기는커녕 이대로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덴스케!]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덴스케를 구해야만 한다. 덴스케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장치가 발하는 광선이 나를 날려버렸다. 지금 내 전뇌력은 현저하게 저하되어 있었다. 나 혼자 허둥댄다고 무엇 하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어쩌지, 약속했는데. 어쩌지, 덴스케를 고치는 것만이 나와 오코노기 유코와의 마지막 남은 인연의 끈이었는데.
[아마사와.]
목소리가 침착한 어조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마사와, 정신 차려.]
오코노기 유코가 있었다. 기계실에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와 내게 달려왔다.
[어떻게 여길...]
[할머니한테 들었어. 네가 덴스케를 치료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은 메가옹네 서재와 비슷한 환경, 즉 할아버지의 연구공간이 아닐까 생각했어.]
오코노기 유코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쓰다듬었다. 내 속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포기해서는 안 돼. 나는 일단 덴스케가 녹아버리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으려고, 남은 메타버그를 긁어모아 내던졌다. 어제 아침 메과자점에서 사온 것을 개조한 태그였다. 오코노기 유코가 함께 태그를 던지면서, 목소리를 높이며 이었다.
[메가마스의 연구시설이 이 폐공장에 있었다고 메가옹이 알려주었어. 그래서 너는 이곳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했어.]
[용케 이곳을 알았구나. 계단을 어떻게 찾았지?]
[우연이었어. 공장 안을 이를 잡듯이 샅샅이 찾아봤어. 계단은... 그 말을 보고 알았어.]
[말?]
메타태그를 던지는 것을 멈추고 오코노기 유코를 보았다.
[기계실의 기둥에 써있는 단어 말이야.]
내가 읽지 못했던 기호 말인가.
[전뇌코일.]
비명이 울려퍼졌다. 덴스케였다. 메타태그만으로는 역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토록 강력한 전뇌공간이 덴스케를 부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봐봐!]
오코노기 유코가 외쳤다. 공간의 사방에 퍼져있었던 짙은 안개가 그대로 검은 형체가 되어 몇 개나 생겨났다.
[눌이야. 저것에 닿으면 우리들은 저쪽세계로 끌려가버리고 말거야!]
눌 한 기가 오코노기 유코를 덮쳤다. 오코노기 유코가 간신히 피했다. 한계였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죽이며, 덴스케를 설치한 장치를 향해 빔을 쏘았다.
공간이 강하게 흔들렸고, 순간 우리들은 넘어졌다. 장치에 구속되어 있던 덴스케가 간신히 구속에서 풀린 듯 흐느적거리며 걸었다. 나는 서둘러 덴스케를 끌어안고 오코노기 유코에게 건넸다.
[미안, 역시 고치지 못했어.]
말하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설마, 내가, 오코노기 유코가 보는 앞에서 울다니. 아니, 지금의 나는 이미 아마사와 유코가 아니다. 암호사도 아니다.
[난 쓸모 없는 애야. 덴스케도 고치지 못하고, 쿄코와 메가옹과의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는 쓰레기야.]
오코노기 유코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은 엄습하는 눌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방금 전까지 장치가 있던 곳에 열쇠구멍 모양의 안개가 나타난 것을 시선 끝으로 확인했다.
[오코노기, 덴스케를 데리고 어서 여길 나가! 적어도 덴스케를 쿄코에게 돌려보내줘.]
떠밀듯 덴스케를 오코노기 유코에게 건넸다.
[아마사와 너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어. 안경을 잃으면 오빠를 도울 수도 없어. 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저 안으로, 저 공간의 끝에 있는 미치코에게 가는 거야. 그러면 조금이라도 오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
오코노기 유코가 절규했다.
[미안해.]
열쇠구멍의 안개로 뛰어들며, 뒤돌아 빔으로 장치를 쏘았다. 끊어져 가는 전뇌력으로 발사한 빔은 약하지만 정확하게 급소를 꿰뚫고 장치를 파괴했다.
열쇠구멍이 닫혀갔다. 이걸로 영원히...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오코노기 유코가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치는 모습이었다.
[아마사와!]


제2장 내일로 돌아와라!

나 오코노기 유코를 집까지 데려다 준 사람은 유키노와 덴파였다. 내 눈 앞에서 아마사와가 저쪽세계로 가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입구를 닫아버렸다.
[아마사와!]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지하실의 벽을 튕귀며 둔하게 울려퍼질 뿐이었다.
아마사와가 사라졌다. 눌도 사라졌다. 공중에 떠돌며 나란히 있었던 장치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바닥을 기는 전뇌안개와 파괴되려는 것을 간신히 아마사와에게 구원을 받은 덴스케, 그리고 아마사와의 빈껍데기였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또 잃고 말았다.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 때문이다. 내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래서 언제나 소중한 것이 내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타라도, 아마사와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멍하니 얼굴을 돌리자, 나를 노려보며 내 어깨를 흔들고 있는 후미에가 있었다.
[정신 차려. 야사코!]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이사코랑 만났지?]
다시 한 번 끄덕였다.
[이사코는?]
나는 바닥이 쓰러져 있는 아마사와의 빈껍데기에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저쪽세계로 가버렸군.]
끄덕였다. 이걸로 세 번째.
[좋아. 야사코, 섣불리 움직이지 마.]
사실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을 텐데, 후미에는 똑 부러지게 내게 다짐을 주었다. 후미에는 대단하다. 후미에는 강하다. 잠시 뒤 후미에의 연락을 받은 애들이 찾아왔다. 다이치, 나멧치, 유키노, 덴파, 아키라였다.
가장 마지막에 얼굴을 보인 것은 가챠기리였다. 가챠기리는 바닥에 누워있는 아마사와를 보고는 똑바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아마사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사와는 눈을 감은 채였는데, 어째선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사코를 옮기자.] 가챠기리가 결연히 얼굴을 들었다.
[어디로?]
다이치가 되물었다. 당연히 아마사와의 오빠가 있는 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절대로 싫었다. 후미에가 맹렬하게 몰아붙였다.
[안 돼. 이사코의 오빠는 그 자식이잖아. 카지 노부히코잖아. 왜 그딴 녀석한테 이사코를 보내야만 하는데? 이렇게 된 것도 애당초 그 자식 때문이잖아. 애초에 그 인간은 이사코가 여기로 온 것을 알고나 있어?]
가챠기리가 고개를 저었다. [있을 수 없어. 이사코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온 거야. 야사코와 싸운 것조차도 그 사람이 모를 수도 있어.]
[좋은 사람이 있어.]
덴파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마사와와 친한 의사선생님 말이야. 그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야.]
오오, 하고 모두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키라가 바로 반응했다.
[시우 선생님이군요. 저도 찬성이에요. 그 선생님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왜냐면 선생님이잖아요.]
농담을 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아키라의 얼굴을 보건대 진지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다들 시우 선생님을 떠올리고는 그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임에 분명했다.
[좋아. 이사코를 시우 선생님의 병원으로 옮기자. 야사코, 넌 어떡할 거야?]
나는... 말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나는 어떡하면 좋은가.
[넌, 나랑 덴파가 집까지 바래다줄게.] 흔치 않게 유키노가 나서서 말했다. [알았지?] 내게 다짐을 받았다.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유키노가 이었다.
[야사코, 아마 우리들은 이제부터 이사코를 데려오는 데 엄청 고생할 거야. UV케어도, 갈라진 머리카락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너는 오늘은 계속 뛰어다녔잖아? 연결통로에서 이사코랑 대결하고, 옥상에서 결전을 치렀고, 그리고 여기로 이사코를 찾으러 왔어. 더 이상은 몸이 버티지 못해. 너는 힘든 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어. 알았지?]
유키노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유키링, 좋은 생각이야.] 후미에가 엄호했다. [야사코, 유키링 말대로 해. 우리들은 이사코를 시우 선생님한테 데려다주고 꼭 연락을 줄게.]
나는 간신히 천천히 끄덕였다.
유키노와 덴파에게 안기듯 집으로 돌아온 내게, 후미에네가 온 것은 저녁 다섯 시가 넘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다들 묘하게 활기차게 엄마에게 인사하고는, 운동화를 대충 벗어젖히고 내 방으로 밀려왔다. 후미에, 다이치, 나멧치와 아키라가 있었다. 가챠기리는 어느 사이엔가 가버렸다고 했다. 가챠기리다웠다. 딱히 야속하지 않았다.
방구석에는 골판지로 만든 덴스케의 집이 있었다. 그 안에서 덴스케가 추욱 늘어져 있었다. 곁에는 계속 쿄코가 달라붙어 있었다. 가챠기리는 그런 식으로 시우 선생님의 집 근처에 있을 지도 모른다. 깊은 잠에 빠진 아마사와의 곁에서, 언제나처럼 군모를 푹 눌러 쓰고 양손을 점퍼에 찔러넣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사코는 시우 선생님의 방으로 데려다놨어.]
엄마가 내어온 센베(곡물로 만든 일본전통과자/역주)를 아삭아삭 씹어 먹으면서 편하게 앉은 다이치가 빠른 어조로 보고했다.
[미리 전화를 했더니 시우 선생님이 뒷문에서 기다리고 계셨어. 그래서 이사코에 대한 일로, 우리들이 다른 어른들에게 귀찮게 질문을 받거나, 소란이 나는 일도 없을 거야.]
시우 선생님이 사는 곳은 병원 부지 안이었다. 그 선생님이라면 분명 척척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이사코는 책임지고 맡겠다고, 그렇게 말씀해주셨어.]
나는 시우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웃으면 멋들어지게 눈꼬리에 주름이 생겼다. 엄하면서 상냥하고 듬직한 성인 여성이었다.
[그보다, 카지 노부히코라는 사람 말이야.] 정말로 짜증난다는 듯 얼굴을 한껏 찌푸리면서 후미에가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새끼는 진짜 개자식이야.]
[만났어? 언제?]
[시우 선생님네에서 돌아오는 길에 메가마스 본사로 쳐들어가서 안내데스크에다가 카지 노부히코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지. 애들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어른이었으면 쫓겨났거나 경찰에 신고 되었겠지만, 안경을 개발하는 그 오빠를 만나고 싶다고 둘러대면서 떼를 부렸지. 그랬더니 바로 불러주더라고.]
얘네들이 카지 노부히코와 로비휴게실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다이치와 후미에와 나멧치와 아키라가 돌아가면서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에 말하다가 짜증이 나서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넘겼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예의상 이사코를 시우 선생님에게 맡겼다고 말했어. 그리고 당신 때문에 이사코는 저쪽세계로 뛰어 들어갔다고 말했어. 하지만 콧방귀를 뀌면서 실실 쪼개더라?]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지. 그러더니 유코는 자기랑 따로 떨어져서 살아서 자기랑 함께 있는 것보다 시우 선생님과 같이 있는 편이 편안하지 않겠냐, 이러더라고... 그래서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멧치의 어조가 초조한 듯 모나 있었다. 마지막은 카지 노부히코를 향해 말하는 듯했다.

다이치가 그 뒤를 이었다.
[8년 전에 사고가 일어났던 안경이벤트회장에 이사코랑 걔 오빠도 있었어.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사코는 지 오빠랑 엄마랑 떨어져서, 숙부숙모네 양녀로 지냈대. 성이 다른 것은 그 때문이었던 거야. 학교에 등록된 부모님은 숙부숙모였던 거였어.]
[그럼 왜 보호자가 따로 있는 거야? 아무리 양녀라고 해도 부모님이 있는데 보호자는 필요 없잖아?]
[그건 알 수 없었어요.]
설명은 아키라에게 이어졌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형이 관계되어 있을 것 같아요. 왜냐면 그 형은 이사코 누나를 전혀 걱정하지 않더라구요. 저희들이 다그쳐도 코웃음 치면서, 너희들하고 유코랑 질이 달라, 이러던데요.]
질. 성질? 아마사와가 그렇게나 특별한 성질을 지닌 애였단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겉치레를 좋아하고, 외로움을 타고, 모든 것이 우리들과 비슷한 평범한 여자애였다. 단 하나, 탁월한 안경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말고는.
[이마고야.]
딱 잘라 후미코가 말했다.
[이사코에게는 이마고가 있고,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없어. 전에도 말했었지? 이마고는 생각으로 안경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이야.]
카지 노부히코는 이 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유코와 너희들은 차원이 다르다.
<미안. 좀 잘난 척 하는 것 같았나? 하지만 정말로 그래. 유코는 특별해. 너희들이 할 수 없는 일도 유코는 할 수 있어. 걔는 선택받은 아이야. 얘들아, 너희들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게 너희들 책임이 아니잖냐? 노력해봤자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너희들을 경멸하거나 깔보는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마. 하지만 유코가 선택받은 아이라고 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야. 일리걸 같이 쓰레기 같은 바이러스 유령에서 반짝버그라고 하는 고농도의 전뇌물질을 추출해서 그것으로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를 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 같냐? 반짝버그의 추출기술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고도의 기술이라는 건 아니? 너희들 중에 할 수 있는 사람 있어? 없지? 그래서 너희들의 걱정은 오버인거야. 축구를 처음 하는 애가 프로 선수가 슬럼프에 빠졌다고 걱정해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참견이겠지? 걱정하거나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수준의 사람 뿐이야. 차원이 다른 사람이 해봤자 의미가 없어. 하지만 뭐, 너희들이 유코를 걱정해주니 걔 오빠로서는 기쁘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잃고, 나와 어머니와 떨어져서 자란 유코는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너희들 같이 평범한 친구들이 생겨서 즐거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줘라. 아 맞다, 저쪽세계에 갔다고 하는 이야기 말인데, 유코가 저쪽세계로 들어갔다고 해서, 너희들이 섣불리 휘말려들어간 것과는 다르게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다. 유코한테는 공간을 오고가는 힘이 있어. 반짝버그 없이도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를 열었다는 말은 저쪽세계 안에 있는 코일도메인에 다이렉트로 접속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말이겠지. 내게 말없이 가버린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유코는 제힘으로 돌아올 거다. 유코는 나를 배신하지 않아. 아니, 배신할 수 없지. 유코는 지금 기술을 연습하는 도중이야. 전뇌체가 빠져나간 실체는 시우 선생님이 돌봐주시고 있으니 잘 되었지. 그래서 또 뭔데? 질문 있니?>
[진짜 어이없지 않니!]
다 듣자마자 한 마디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다는 듯 화낸 사람은 유키노였다.
[대체 오빠라는 사람이 왜 그래? 정말 저질이야. 그렇게까지 심한 말을 듣고 너네들 그냥 돌아온 거니? 후미에, 네 주특기인 빈정거림으로 맞받아쳐 주었지? 다이치, 한 방 정도는 때려줬지? 안 그랬어? 가챠기리는? 그렇게나 이사코 편을 들어주었으면서 그런 때에는 뭐했니? 됐어, 내가 갈 거야. 내가 가서, 그 카지 노부히코 라는 사람을 때려눕힐 거야!]
진정해, 하고 모두가 필사적으로 유키노를 말렸다.
[거기서 우리들이 다투지 않고 돌아온 이유는 둘 있어.]
다이치가 등을 꼿꼿이 펴고 팔짱을 꼈다.
[우리들의 목적은 이사코의 구출이야. 그 인간을 때려눕힌다고 한들 의미가 없어. 그러다가는 신고당해서, 우리들이나 우리들의 안경이 블랙리스트에 오를 뿐이야. 일이 꼬이면 구출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돼. 애초에 우리들이 그 인간에게 간 이유는 이사코를 데리고 돌아올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녀석은 거만한 무능아에 아무런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 그렇다면 괜히 상대할 필요가 없어. 혹시 그 인간은 이사코한테도 무시 받았던 게 아닐까? 자기도 그걸 아는 지 이사코에게 살짝 발끈했다는 느낌도 들었고.]
[다른 하나는?] 유키노가 다그쳤다.
순간 모두가 머뭇머뭇 얼굴을 마주보았다.
[뭐야, 말해봐.]
[이사코의 안경이 끝나간다는 걸 대해서 말하지 않았어...] 후미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화가 나지만 그 자식이 말한 대로야. 이마고라고 하는 특수능력을 가진 이사코라면 반짝버그가 없이도 자유자재로 저쪽세계와 이쪽세계를 오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의 이사코는 달라... 안경이 끝나가고 있어. 스스로의 힘으로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를 열었을 정도니 아직은 어느 정도의 힘은 남아있을 것 같지만, 저쪽세계에 오래 있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거야.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빨리 데려와야만 해. 그래서 원래라면 안경이야기를 하면서 그 자식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
하라켄을 떠올렸다. 하라켄이 저쪽세계로 들어간 시간은 아주 잠깐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하라켄의 전뇌체와 빈껍데기가 되었던 실체가 제대로 합쳐지지 않았다. 하라켄은 지금도 계속 잠들어 있는 채였다. 깊게.
[하지만 말 안 했어.] 다이치가 말했다. [이사코의 안경이 끝나가고 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은 훨씬 위험하다, 그 인간에게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 없었어.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모두가 깊게 끄덕였다. 그 기분은 나도 뼈저릴 정도로 잘 알았다. 저쪽세계로 사라질 때의 아마사와의 마지막 말이 내 안에 박혀있었다.
미안해.
아마사와는 그 비밀을, 안경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오빠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떠난 것이다. 오빠가 있는 이쪽세계를 떠나 저쪽세계로... 저쪽세계에 있다고 한다는 코일도메인으로.
[결론을 말하자면, 그 인간은 도움이 안 돼. 이사코는 우리들의 힘으로 구한다.]
다이치의 말에 모두가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간 침묵했다. 모두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저쪽세계에서 아마사와를 데려온다. 그것이 우리들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하는 안경의 마지막 모험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후미에가 떠올린 듯 말했다. [그 자식이 딱 한 번 말문이 막혔더라고.]
후미에가 후련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 자식이 말야,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유코는 너네들과는 다르다고 같은 말을 반복하잖아. 질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 유코는 선택받은 아이다, 그런데 그것은 너희들 때문이 아니야, 유코가 특별한 거다, 이 지랄하잖아. 말투가 졸라 사람 빡치게 하잖아. 그런데 그 때.]
가챠기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항상 그랬듯이 툭 내던지는 말투로.
그험 형도 유코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건가요?
뭐? 하고 순간 카지 노부히코의 얼굴이 무표정이 되었다.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어. 멀뚱멀뚱하다고 할까, 정신이 나갔다고 할까, 어쨌든 얼굴이 창백해지더라고. 꼴좋다. 난 책상 밑으로 주먹을 수천번은 내질렀을 걸. 가챠, 걔 대박 터트렸다 아이가!]
그렇게나 청산유수처럼 말하던 카지 노부히코의 말이 뚝 그쳤다고 한다. 그리고는 엄청나게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대박이었어. 분노 때문에 온몸을 부르르 떨더라. 양손을 어찌나 꽉 쥐던지 손가락 끝이 하얘져서, 팔의 혈관이 다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카지 노부히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경을 사용하는 너희들과 안경 없이 전뇌공간에 접속하여 연구하는 나를 동급 취급하지 마라. 유코의 특별한 능력이 너희들에게 없다고 남한테 분풀이 하는 거 아니다.>
[분풀이 좋아하네. 바보 아냐? 녀석은 이사코를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특별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야. 이사코가 지 여동생이라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신을 이사코랑 같은 레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이사코랑 같은 위치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거지. 웃기지 말라고 해. 이사코는 너 같은 무능남하고는 다르다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최강의 안경유저라고.]
후미에가 열변했다.
[하시모토는 아마사와를 정말 좋아하는 구나.]
덴파의 감동에 찬 중얼거림에, 후미에가 확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냐! 나는 이사코의 전뇌력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야. 내가 걔를 왜 좋아하냐! 싫거든? 진짜 싫거든? 잘하는 척은 다하고, 결국 남이 도와줘야하는 성격이 삐뚤어진 애가 어디가 좋냐!]
말하면 말할수록 후미에가 아마사와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와 닿았다. 하지만 우리들은 후미에를 놀리지 않았다. 모두 같은 기분일 테니까. 아마사와는 유일하면서도 절대적인 최강의 안경유저였다.

[하지만.] 나멧치가 갑자기 말했다. [이사코 정도의 안경유저가 어째서 그런 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사코가 더 수준이 높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필사적으로 반짝버그를 모으거나,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를 열고 끝내는 스스로 그 안으로 뛰어든 거야?]
전에 아마사와가 내게 말했었다.
만약 네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네가 구하고 싶었던 사람이 너를 매우 미워하고 있다면, 오코노기, 너는 어떡할 거니?
그 때의 아마사와의 얼굴을 불안해보였다. 그리고 아파보였다. 나는 그 때 또다시 아마사와의 약점을 본 것 같았다. 아마사와는 감정에 약하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향한 감정이, 그것이 미움이건 애정이건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과도하게 거부하거나 과도하게 매달리곤 했다.
다이코쿠에 전학 오기 전에 벤텐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학급친구들의 안색을 살피곤 했다던 아마사와의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며, 이이지마 사토코에게 부추김을 받고 자기도 이이지마를 이용할 셈으로 벌였던 아마사와 유코 강림 소동 역시나 결국에는 아마사와가 신도들로부터 쏟아지는 동경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계속 추구해 왔던 오빠에게 일찍이 없을 정도로 강한 애정과 미움을 받아 판단 정지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어쨌든 가챠기리의 한마디가 노부히코에게 못을 박은 것은 사실이야. 왜냐면 얼마나 분했는지 안 해도 될 말을 던졌거든. 그것도 엄청난 힌트를 말이지.]
[아마사와를 구하기 위한 힌트?]
[응.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
도움을 구하듯 후미에가 다이치를 보았다. 다이치가 이었다.
[녀석이 이렇게 말했어.]
<너희들, 아무리 유코가 걱정된다고 뒤를 쫓아가려고 해도 소용없다. 입구는 이미 닫혀있으니까. 아무리 안경기술이 높아도 너희들의 안경은 메가마스 거잖아? 그거로는 안 돼. 왜냐면 저쪽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은 이마고를 가진 사람이나 안경을 처음에 개발한 코일코일스 제품의 안경을 쓴 사람뿐이니까.>
코일코일스의 안경. 다시 떠올린 듯 화내면서 후미에가 말했다.
[그 자식, 복제라고 구라 쳐서 자기 안경을 이사코에게 줬던 거였어. 그러니까 이사코의 능력의 일부는 자신의 것이다, 이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거였어. 에휴, 분통 터지지... 그런 귀중한 정보를 얻었는데, 우리들이 가진 메가마스 안경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니.]
나는 내 안경에 손을 가져갔다. 내 안경은 할아버지가 회사에서 얻은 안경을 손수 튜닝해서 내게 선물해주신 것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계속 신기했다. 제로삼형 안경. 이것은 메가마스가 안경을 제조하기에 앞서 존재했던 오리지널 모델넘버였다. 혹시, 내가 가진 이 안경은 메가마스에서 기술연구를 하고 있었던 할아버지가 만든, 코일코일스의 안경이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나라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사와를 이쪽세계로 데려올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가 정리된 뒤, 애들은 내일 다시 한 번 만날 약속을 했다. 애들을 보내고, 메과자점으로 가서 할머니 메가옹을 도와 가게 뒷정리를 했다. 그 다음 메가옹이 여행지에서 사온 좌욕만쥬를 먹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의 일이었다. 나는 덴스케의 집을 바라보면서 기나긴 하루의 일을 멍하니 반추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보자 [잠깐 이야기 좀 할까?]하고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시침은 오후 8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퇴근이 빨랐구나. 멍하니 생각했다. 아빠가 내 방에 오는 일은 처음이었다.
방에 들어온 아빠는 아빠가 볼일이 있어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듯, 빙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이단 침대 밑에 앉았다.
[쿄코야, 엄마가 부르잖니.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 마시래.]
또옹! 활기차게 평소처럼 대답을 한 쿄코가 방에서 뛰쳐나갔다. 방에는 나와 아빠만 남겨졌다.
[안경을 아빠에게 줘라.]
아빠가 말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빠가 그런 말투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경을 아빠에게 줘.]
다시 한 번 말했다.
[왜?]
아빠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짜증난다는 느낌이 아니라, 개를 무서워하는 어린이가 심부름을 하러 가는데 가는 길목에는 개가 있었고 도저히 그 앞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어서 크게 마음 먹고 호흡을 고르는, 그런 느낌의 한숨과 닮아있었다. 불안하지만 나아가야만 한다.
[아빠는 전부터 네게 말했다. 다이코쿠는 전에 살던 이루히메와는 달라서 전뇌설비가 정비되어 있어. 정보량도 터무니없이 많지. 영상의 자극도 심해. 그래서 이루히메에서 했듯이 느긋한 안경놀이에 싫증을 느껴서 점점 안경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조심해야만 한다고 아빠가 말했었지? 안경 때문에 사고가 이루히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안경으로 보는 환상에 놀라 차도로 뛰쳐나가다가 차사고를 당하거나, 불법소프트웨어를 지나치게 사용하다가 전뇌빔이나 전뇌폭탄 같은 도구에 충격을 받아 몸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 네 친구도 한 명 크게 데였었지?]
[담력시험 말이야?]
맞아 그거, 라며 아빠가 몇 번이나 끄덕였다.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에 우리들은 전뇌생물부의 합숙을 하게 되었고, 코일전뇌탐정국과 헤이쿠는 결판을 짓기 위해 한밤중의 학교에서 전뇌담력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그러다가 학교 안에서 발생한 낡은 공간 때문에 시험 중이었던 후미에가 행방불명이 된 사고가 났다. 그 후로 안경을 쓴 아이들의 처우에 대해 공간관리실은 매우 민감해졌던 것 같았다. 우리들이 안경과 다이코쿠에서 있었던 행방불명의 전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그 사고가 원인이었다.
[그 때 아빤 네게 말했지. 이루히메와는 다르다. 불법소프트나 자극적인 놀이 같은 것을 하지 말라고 말이다.]
[응. 그 뒤에 모초고리순례 축제가 있었는데, 애들이 안경 단속이 심해졌다고 했어. 안경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다들 조심하는 눈치랬어.]
[하지만 그래도 사고는 일어났지.]
[아빠는 그게 아마사와 때문이라고 했어.]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되어 있었다. 그 정도로 나는 힘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아빠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거나 대답할 생각도, 그럴 자신도 없었다. 반항할 셈은 없었지만, 생각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초고리순례날 밤에 노점상의 가스봄베가 폭발해서 화재가 일어났어. 불이 난 것만으로도 큰일인데, 다이코쿠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 얽혀서 붉은 기둥이 나타났다고 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있어서 더 난리가 났어. 화재는 큰일이었고, 전설은 옛날부터 있던 거니까 할 수 없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사고가 나면 사람들이 크게 다치겠지. 나도 그 때는 속이 안 좋아져서 후미에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화재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는데, 아빠는 나중에 그게 다 아마사와 때문이라고 말했어.]
황급히 아빠가 변명했다.
[그건 아니다. 그런 소문이 있다고 했을 뿐이잖니.]
[무슨 소문인데?]
[그러니까.]
말문이 막힌 아빠에게 추격을 가하듯 말했다.
[축제 때 일어난 폭발은 누가 불을 질렀다고 했어. 범인은 아마사와가 아니냐고 아빠는 그 때 분명히 그런 식으로 말했어.]
[아빠는 한마디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었잖아. 아마사와를 의심했었잖아.]
아빠가 팔짱을 다시 꼈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 때의 자세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어졌다.
[그 때 아빠는 이런 식으로 말했어.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애가 그랬을 수도 있다고. 예를 들면 최근에 온 전학생 같은 애가 남들에게 주목을 받고 싶어서, 같은 반 친구들이 근처에 있으니까 그만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고 말이야.]
아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 말이 맞아. 아빠는 분명 아마사와가 범인이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말투가 아마사와를 경계해라, 걔랑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말라, 그런 식으로 말한 건 맞잖아?]
한 마디 한 마디를 이를 악물면서 정성껏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은 점점 빠르게 아빠를 향해 닥치는 대로 쏟아내 것처럼 되었다.
[말해줘. 아마사와의 어디가 나쁜 거야? 왜 걔랑 친하게 지내면 안 돼? 걔는 불을 지르지도 않았고, 나도 걔에게 해코지를 당한 적도 한 번도 없었어!]
코 안쪽이 찡하고 뜨거워졌다. 이루히메에 살았을 적에, 아빠와 덴스케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날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덴스케가 웃고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빠는 덴스케와 같은 종의 개는 얼굴의 근육이 그런 식으로 되어있다는구나, 하고 동물도감을 사용해서 정성껏 알려주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아빠에게는 덴스케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는 마치 바로 곁에 덴스케가 있는 듯 덴스케에게도 들려주듯 이야기해 주었다.
아빠와 덴스케와 나. 두 사람과 한 마리의 행복한 일요일의 오후였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다. 아빠도, 나도, 그리고 덴스케도. 모두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마사와가 유코한테 소중한 친구라는 것은 잘 알았다.]
긴긴 침묵이 지난 뒤 아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빠가 근무처인 공간관리실에서는 아마사와 유코라는 애가 요주의 인물이야. 공간관리실이 보유한 초기형 바이러스 삭제소프트 서치를 파괴했어.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최근에는 다이코쿠 교외에서 신형마저 파괴되었어. 특정은 되어있지는 않지만, 그것도 그 애가 연관되어 있다는 혐의가 강해.]
[하지만, 그건.]
말하려다가 망설였다. 큐브를 파괴한 것은 아마사와 뿐만이 아니라, 아빠의 눈앞에 있는 나도 함께였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후미에, 다이치, 나멧치...
[어쨌든, 아빠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사와의 일이 아니다. 최근 다이코쿠에서는 오랜 데이터가 퇴적된 공간이 여기저기 나타나서 사고가 일어나고 있어. 전뇌펫을 잃거나, 안경데이터가 지워진 초등학생이 여럿 있어. 그 뿐만이 아니야. 안경의 끝나는 것 때문에 답답해져서 안경소프트를 다루는 가게를 습격하는 초등학생들도 생겼어. 너도 알지? 메과자점도 그랬잖니.]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우리들의 힘으로는 메과자점을 지킬 수 없었다. 지키기는커녕 소란을 틈타 쿄코마저 카지 노부히코에게 끌려가기까지 했다.
[지금의 이런 상황은 너희들에게는 너무 위험해. 그러니까 안경을 아빠에게 맡겨라.]
[하지만.]
[영원히 가져간다는 게 아니야. 아주 잠깐 동안만 아빠에게 맡겨달라는 거야.]
[싫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어서.]
아빠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매우 깊고 지친 한숨이었다.
[네 안경을 지키기 위해서다...]
안경을 지켜? 나는 어느 사이엔가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고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결심한 듯 조용히 말했다.
[전체포맷이 있다.]
전체포맷.
[아, 전에 들었었지...]
[그래. 다이코쿠는 애초부터 공간이 불안정한 곳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불안정함이 너무 심각해. 큐브를 도입해서 잠시 상태를 보았지만 시청에서 그것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어. 이참에 마음먹고 낡은 공간을 모두 깨끗하게 삭제하겠다는 거지. 모든 큐브가 총동원되어서 아무리 작은 공간의 왜곡도 놓치지 않고 남김없이 처리할 거야.]
잠깐만. 낡은 공간을 삭제한다고? 그렇게 되면 아마사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저쪽세계로 들어가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아마사와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언제 한대?]
아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일까. 아마 전체포맷를 한다는 사실조차도, 원래 말해서는 안 돼는 극비사항임에 분명했다.
[이번에 있을 전체포맷은 긴급성의 강제조치야. 개인데이터조차 보호되지 않아. 시행하기 직전에 경고는 발령되겠지만, 안경을 사용해서 공간에 파고드는 놀이를 하고 있다면 아주 위험해. 그러다가는 안경뿐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몸에도 악영향을 줄 거야.]
두근거렸다. 그런 엄청난 일이 정말로 실행된다니.
[안경을 다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아빠가 말했다. 더 이상 한 걸음도 양보할 수 없다는 엄연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빠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조용히 안경을 벗었다.
[응.]
아빠는 내가 내민 안경을 조용히 받아들었다.
겨울 아침은 늦게 찾아온다. 아직 태양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오전 다섯 시,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구석에 놓여있는 골판지를 끌어안았다. 안경이 없는 내게는 보이지 않지만, 안에는 덴스케가 있을 것이다. 나는 쿄코를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방을 나왔다.
우리 집과 메가옹이 사는 메과자점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끝에 문이 있었고, 그 너머가 메가옹이 사는 곳이었다. 문 주위로 하얗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메가옹은 벌써 일어나 있었다.
[오호. 오호. 야사코야, 일찍도 일어났구나.]
메가옹은 코타츠(탁자에 두꺼운 천을 두르고 바닥에는 목탄 등을 불을 때워 몸을 데우는 일본 전통 난방기구. 오늘날에는 전기로 발열한다/역주)에 다리를 넣어 등을 둥글게 구부리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도 마실래요.]
[아침에 마시는 녹차는 기운이 나게 하거늘. 그래, 바로 끓여주마.]
메가옹이 내가 마실 차를 끓이고 있는 동안에, 나는 방구석에 골판지를 두었다.
[어제 밤에 했던 이야기 마저 듣고 싶어서 왔어요.]
[어디보자. 무슨 이야기였더라.]
메가옹은 내게 찻잔을 건네면서 가볍게 고개를 갸웃했다.
[말 돌리기 없기. 어제 좌욕만쥬를 먹으면서 했던 이야기요. 할아버지요. 할아버지가 메가마스의 연구자였고, 안경을 처음으로 만든 코일코일스의 기술을 조사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리고 그 연구실은 역 남쪽에 있는 회사부지에 있었죠? 지금은 폐공장이 되어버렸지만요.]
[오오, 그랬지. 영감은 매일 거길 다녔었지.]
[거기에 실험공간이 있었어요. 표시가 있었죠. 전뇌문자로 작게 전뇌코일이라고 쓰여있었어요. 그 방의 지하에서 아마사와가 저쪽세계로 가버렸어요. 덴스케를 치료하려고 한 뒤에요.]
[무어라?]
나는 메가옹에게 어제 저녁에는 듣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을 들으려고 마음먹었다. 그 때는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빠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이코쿠에서 곧 대규모의 전체포맷이 실시될 예정이다. 포맷이 되어버리면 아마사와가 있는 세계로 가는 입구도 삭제되고 만다.
[그런 것이었구먼...]
아마사와가 사라진 경위를 간단하게 다 말하자, 메가옹은 그제야 다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열쇠는 덴스케였거늘.]
[덴스케가?]
[덴스케가 그 공간으로 접속하기 위한 열쇠였던 거 같구먼. 덴스케는 영감이 개조한 전뇌개였는데, 개조하면서 암호를 심어놨던 게다. 덴스케에 설치되어 있던 암호가 영감의 실험공간에 가기 위한 비밀번호였던게다.]
그러고 보니 아마사와가 우리 집에 묵었던 날 밤, 상태가 악화된 덴스케의 치료를 시도하던 아마사와가 <이 개는 평범한 전뇌펫이 아니야.>라고 말했었다.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개조한 전뇌생물이라고 했다. 나는 내 생각을 메가옹에게 말했다.
[아마사와를 이쪽세계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 가지예요. 저쪽세계로 통하는 입구. 열쇠가 되는 덴스케. 그리고 또 하나, 코일코일스의 안경이죠.]
[코일스 말이냐? 메가마스 것이 아니라? 과연...]
[점심때 아마사와네 오빠에게 만나러 갔을 때, 후미에네들이 그렇게 들었대요. 아마사와의 오빠는, 저쪽세계로 갈 생각이라면 그 안경으로는 안 된댔어요. 꼭 코일스 안경이어야만 한대요.]
[저쪽세계의 안에 있는 코일도메인은 코일스가 남긴 실험공간이니라. 그곳에 가려면 코일스의 안경으로 접속하는 것이 당연하겠구먼. 그건 그렇고 왜 영감이 그렇게나 코일도메인을 잠그려고 했을꼬. 영감이 없어졌다고 접속할 수 없어졌다고 하면, 그 공간은 저쪽세계의 안에서도 상당히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 같구나. 그렇게까지 해서 영감은 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했을꼬.]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해요. 그 공간은 이제 단순히 잠겨진 공간이 아니에요. 왜냐면 지금 아마사와가 그 안에 있으니까요.]
메가옹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약간 슬픈 듯 못 봐주겠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루히메다.]
메가옹이 툭 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덴스케를 사용해서 코일스의 실험공간에 갈 수 있는 입구는 두 군데가 있다. 이건 나도 영감이 했었던 잡담으로 들었던 이야기라 자세한 것은 모르거늘. 그 공간으로 가는 입구는 둘 있는데, 하나는 영감이 매일 출근하는 연구소 안에 있었다고 했다.]
[그것이 폐공장이죠?]
[그래. 그 부지에 있던 자회사가 도산한 뒤 연구실은 메가마스 본사로 옮겨졌고, 영감도 죽고 나서 연구소가 있던 곳은 처분되었겠지. 그리고 다른 하나의 입구가...]
[이루히메.]
메가옹이 끄덕였다. [그런데 그쪽은 나도 정확한 위치까지는 모른다. 안경을 개발하기 전에 코일스가 작은 전뇌개발회사였을 적에, 이루히메에 본사가 있었다. 그래서 혹시라면...]
코일코일스가 일찍이 있었던 곳, 이루히메. 내가 올 봄까지 있었던 이루히메. 타라를 잃어버린 곳, 이루히메. 떠올랐다. 높은 건물이 전혀 없고, 여름이 되면 포장된 도로가 햇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눈부시고, 순환버스가 거대양판점 거리와 바닷가를 달리는 한적한 도시였다.
[갈게냐.]
메가옹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되돌렸다. 메가옹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미 파악한 듯했다.
[갈래요.]
나는 찻잔에 남아있던 차를 다 마시고, 다리를 넣고 있던 코타츠에서 굳게 일어났다.
[저녁에 맡겨놨던 안경을 돌려주세요. 할아버지가 개량해주신 코일코일스 모델의 제 안경을요.]



제3장 또다시, 이루히메로

덜컹덜컹, 단조로운 진동이 기분 좋았다. 다이코쿠역 출발 이루히메행 열차는 텅 비어있었다. 여름방학이었다면 해수욕객으로 북적거렸을 열차였지만, 연말의 귀성까지는 아직 이른 시기여서, 지금이 가장 타는 사람이 적은 시기일 지도 모른다.
나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 차량 안의 열기로 흐려진 유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투명해진 창 너머로 겨우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처럼 열차 안에서 새벽을 본 적이 있었다. 다이코쿠로 이사 갔을 때였다. 그 때 날이 밝아오며 처음으로 본 하늘을 보고, 나는 새롭게 태어난 파랑이라고 생각했었다. 기나긴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나는 혼자 이 기차에 타고 있었다. 그때와 다른 것은 출발이 아침이라는 것과 곁에 쿄코가 없다는 것이었다. 덴스케만이 내 바로 옆에 웅크려 간혹 머리를 들고 바깥 풍경을 보더니 다시 누웠다.
덴스케를 데려가는 데에 주저했었다. 덴스케의 몸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공장 지하에서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지는 않았지만 나른한 듯 동작이 느렸다.
<저녁에 맡겨놨던 안경을 돌려주세요. 할아버지가 개량해주신 코일코일스 모델의 제 안경을요.>
메가옹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불과 두 시간 정도 전의 일이었다. 메가옹은 나를 가만히 보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이리 오거라.>
전의 그 회전문을 사용해서 계단에서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메가옹이 굳게 닫아버렸던 할아버지의 서재였다. 천장에 달린 가는 줄을 당기자, 빠직 메마른 소리가 나더니 주홍빛 전등이 새벽 전의 어두운 실내를 비추었다. 무심결에 휴우, 한숨이 나왔다. 변하지 않았다. 매우 조용하고 온화했으면 안정된 방이었다.
<여기가 영감의 서재이거늘. 영감이 죽었을 때 그대로 보존해왔다. 지금은 얌전한 편이지만 영감이 죽고 몇 년은 공간이 불안정했던 적이 많았지. 지금 생각해보니 쿄코가 들어갔다고 하는 저쪽세계와 맞대고 있었겠구먼. 밑의 불당에다가 내가 만든 거대한 전뇌기계를 설치했을 때, 오작동이 일어나지 않게 방을 전체를 닫아버렸거늘. 어디보자... 안경, 안경이, 어딨더라.>
메가옹이 한쪽 구석의 목제 책장에 손을 뻗었다. 영문 제목의 책이 늘어선 앞에 살포시 그것이 놓여있었다.
<옛다.>
메가옹에게 받은 안경을 양손으로 들었다. 조금 고개를 숙여서 안경다리를 양쪽 귀에 걸쳤다. 얼굴을 들자 주홍빛으로 물든 방구석에서 걱정스럽게 나를 올려다보는 덴스케의 모습이 보였다.
[덴스케.]
꽈악 끌어안았다. 안경과 덴스케는 할아버지에게 받은 생일선물이었다. 그 날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기 때문에, 선물은 할아버지의 유품인 셈이었다. 덴스케를 끌어안아도 감촉은 없다. 하지만 그 때 덴스케는 내 품 속에서 몸을 꿈지럭대며 움직인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끄응, 울었다.
[그렇구먼, 그랬어. 개집에서 나와 우리와 함께 올라왔었구먼. 야사코, 네가 걱정이 되었나보다.]
어젯밤 내가 아빠에게 건넨 안경은 가짜였다. 쿄코가 쓰고 다니는 것과 같은 장난감안경이었다. 나는 아빠가 내 방에 오기 전에 메과자점에서 미리 손에 넣어두었다.
<잠시 동안 진짜 안경을 맡아주세요.>
메가옹은 내 부탁에 이유도 듣지 않고 [알겄다.]하고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진짜를 메가옹에게 맡긴 것은 아빠가 내 안경을 압수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연이었다. 나는 새벽에 몰래 다시 한 번 폐공장으로 갈 셈이었다. 집에서 나가면 엄마랑 아빠가 잔소리하니까 메과자점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셈이었었다. 메가옹이 일찍 일어나 있을 것이고,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것도 예상했었다.
따라서 아빠가 내게서 안경을 압수했을 때, 우연히도 건넨 안경은 가짜였다. 덕분에 나는 아직 안경이 내 손 안에 있었다. 아마사와를 구하러 갈 수 있었다.
[오옷, 이건 무어냐. 이 근방에 숫자와 기호가 엄청나게 깜빡이고 있거늘...]
메가옹이 덴스케의 곁으로 다가가 덴스케의 목걸이를 끊임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메가옹이 만든 안경으로는 덴스케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덴스케의 목걸이가 숫자와 기호의 나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목걸이는 푸르스름하게 발광하며 점멸하고 있었다.
[혹시...]
메가옹이 재빨리 키보드를 열고 맹렬한 속도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역시 그렇군. 이 목걸이와 방이 서로 반응하고 있다. 유코라고 하는 그 애가 입력한 암호가 아직 남아있다면...]
메가옹의 손가락이 매끄럽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뚫었다!]
메가옹의 목소리와 동시에 우리들 주위에 차례차례 이상야릇한 모양의 장치가 출현했다.
[이게 뭐야.]
[이것이 영감의 서재의 진짜 모습, 영감의 두뇌의 중추이니라.]
[덴스케 자체가 열쇠였다니...]
[코일스의 잠겨진 실험공간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여는 열쇠도 이 전뇌개였도다.]
[그럼요, 그럼 말예요. 여기서도 당장 코일도메인에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쪽세계 속으로요. 여기도 입구와 연결되어 있나요?]
[유감이지만 없다. 코일스의 실험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루히메 단 한 곳뿐일 것이니라. 메가마스에서 영감이 접속하던 것조차도 그 복사본에 불과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접속했던 공간, 그 폐공장의 지하실 말이죠?]
메가옹이 끄덕였다. 나는 혼잣말처럼 이었다.
[왜 일부러 그런 불안정한 곳에 만들었을까... 저와 아마사와는 그 폐공장에서 한 번 갇힌 적이 있어요. 맞아요, 메가옹의 의뢰로 행방불명이 된 전뇌펫을 찾아다녔을 때 말이에요. 공장건물은 엄청나게 불안정한 곳이었어요. 그래서 아마사와도 일리걸을 포획하려고 계속해서 암호식을 설치했었죠.]
[바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메가옹이 대답했다. [낡은 공간으로 가는 입구는 불안정한 곳에서만 열린다. 안정된 곳에서 그런 어수선한 공간 같은 게 생길리가 없지. 양날의 검이니라. 위험은 크지만, 불안정한 곳이라서 저쪽세계로 접속할 수 있는 것이다. 본디 다이코쿠는 공간이 안정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야 말로 멀리 떨어진 이루히메에서 만들어진 코일도메인을 다이코쿠에서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코일도메인. 우리들이 평소에 저쪽세계라고 부르던 공간 속에 있는 특별한 구역.
[할머니. 고마워요.]
[벌서 갈게냐.]
나는 끄덕였다.
[덴스케는 어떻게 할게냐?]
[덴스케는...]
망설여졌다. 망설일 때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덴스케가 없으면 아마사와를 수색할 수 없다. 아마사와가 현재 있을 코일도메인에 반짝버그 없이 접속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 덴스케니까.
[데려가라.]
단호하게 메가옹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라고 네게 그 개를 맡긴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 네가 여행을 떠날 때를 위해서 말이다.]
뜨거운 것이 목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것은 목소리가 되어 입에서 나오고, 물방울이 되어 눈에서 흘러내릴 것 같았다. 덴스케를 보았다. 덴스케가 여태까지 없었던 늠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덴스케, 함께 가 줄 거니?]
덴스케가 살짝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전에 네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메가옹이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다이코쿠에 왔을 때, 할미랑 후미에가 코일탐정국에 들어오라고 권했는데 너는 거절했었지. 그러다가 나중에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내게 말했지. 그런 놀이는 속임수다, 모험이나 탐험 같은 것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변한 척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지긋지긋하다고 말이다.]
생각났다. 그날 밤 처음으로 나는 메가옹에게 타라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타라를 구하지 못했고, 타라를 구하고 싶다. 그를 위해서 전뇌력을 키우고 싶다. 그러니까 나를 단련시켜달라고.
[너는 같은 심정으로 유코라는 아가를 데려오려고 하거늘. 그 모험이 네게는 쓸모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아요.]
나는 대답했다.
[모험으로는 우리들은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도망치기 싫어요.]
메가옹에게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때도 너는 같은 말을 했다. 모험이라는 말이 싫다면... 그래, 멀리 돌아가는 여정은 어떠하느냐? 편한 마음으로 멀리 돌아가거라. 원하는 만큼 실컷 말이다.]
고맙다는 말 대신에 나는 깊게 끄덕였다.
[나는 영감의 서재에서 자료를 분석하겠다. 영감의 장치는 애들용이 아니니까, 내 안경으로 충분히 조작할 수 있지. 새로운 정보를 알아내면 바로 연락하마.]
메가옹은 베테랑 해커의 말투로 내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기차의 진동은 이어졌다. 어느 사이엔가 해도 높이 떴다. 다이코쿠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 뒤 메가옹은 내 안경을 정비하고, 몇 가지의 소프트를 설치하고, 여행비까지 얹어주면서 나를 배웅해주었다. 안경과 덴스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지혜와 힘에 구원받아, 나는 지금 이 기차에 올라있었다.
손가락전화였다. 벨이 울리고 있었다. 착신표시를 확인한 나는 바로 연결하면서 차량의 연결부로 갔다.
<여보세요.>
후미에의 약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나야.]
<이거 무슨 소리야. 지금 기차 안이야?>
나는 끄덕였다. 후미에에게는 보일 리 없는데도.
<깜짝 놀랐어. 아침 먹고 가장 먼저 너네 집에 갔더니, 네가 없어졌다지 뭐야. 메과자점으로 갔더니 가게 안에서, 너네 아버지인가? 하여튼 어떤 아저씨랑 메가옹이 험악한 얼굴로 서로 노려보고 있더라고.>
아빠. 그렇구나, 아빠는 메가옹에게 따지려고 했을 것이다. 메가옹은 우리 엄마의 엄마로, 아빠와는 아주 약간의 거리가 있다. 아빠는 데릴사위였는데, 그런 것도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빠가 메가옹의 집까지 쳐들어가서 메가옹을 다그칠 정도니 아빠는 엄청나게 화가 났나보다. 조금 울어버릴 것 같았다. 각오는 했지만, 역시 무서웠다.
<그랬더니 너네 어머니가 날 부르셔서, 네가 이루히메로 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어.>
[엄마가?]
<응. 아주머니가, 지금은 조금 그런데, 나중에 다시 그럴 테니까, 메과자점에서 그걸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더라.>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잊고 무심결에 뿜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대체 뭔데?]
<그니까. 아주머니가 많이 당황하셨어. 말도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말이야.>
바로 옆에 문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 눈부신 하양이 날아가듯 지나쳐갔다. 기차는 산간부로 들어갔다. 당분간 눈 풍경이 이어졌다.
<나도 당황스럽다야. 어제 이야기했잖아. 오늘 다함께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를 찾자고 했잖아. 그런데 왜 혼자 간 거야? 그것도 이루히메 같이 멀리.>
[미안. 지금은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그럴 자신도 없고. 나중에 메가옹한테 물어봐줄래?]
<이루히메에 입구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거지?>
[응.]
<그렇다면 왜 우리들에게, 적어도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야. 너랑 함께 갔을 텐데.>
[나밖에 할 수가 없어. 이것은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내 안경은 코일스 모델이야.]
숨을 삼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내 안경은 코일도메인에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
[내가 꼭 아마사와를 데리고 돌아갈게.]
<혼자서 뭘 어쩌자는 거야?>
후미에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이루히메는 내 고향이니까 괜찮아.]
<작년에 대규모 전뇌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어.>
하루히사의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사고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이루히메도 다이코쿠에 만만치 않을 정도로 공간이 불안정해졌을 거야. 네 안경이 코일스 것이라면 다시 한 번 폐공장 지하실에서...>
[안 돼.]
<왜?>
약간 숨을 들이쉬고 뱉었다. 나는 말했다.
[전체포맷이 실시된대.]
후미에의 대답이 없었다.
[출처는 밝힐 수 없어. 하지만 분명한 이야기야. 만약 내가 폐공장의 지하실에서 저쪽세계로 들어갔다가 큐브가 입구를 삭제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마사와 뿐만이 아니라 나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돼. 난 돌아가고 싶어. 아마사와에게 다시 한 번 만나서, 아마사와와 함께 이쪽세계로 돌아와서, 안경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너나 다이치나 유키링이나 덴파나, 모두 다함께 놀고 싸우면서 지내고 싶어... 만약에 다이코쿠가 전체포맷이 된다고 해도, 이루히메를 통해서 들어가면 아슬아슬하게 돌아올 수 있을 가능성이 있어.]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전차가 덜커덩거리는 진동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입을 연 것은 후미에였다.
[전체포맷은 언제 실시될지 알 수 없어. 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시행되나봐. 만약 실시되면 최대한 큐브를 공격해서 포맷을 늦춰줘.]
<알았어.>
[사실은 포맷 자체를 막아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해. 큐브는 신사나 학교나 개인도메인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올 수 있어. 도망칠 곳이 없으니까 나나 다이치가 아무리 애를 써도 큐브를 격파할 자신이 없어.>
후미에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킬게. 포맷이 시행된다면 가능한 작업을 늦추도록 노력해볼게.>
[고마워.]
<너도 조심해. 아, 맞다, 새해참배는 카야노 신사로 가자. 때깔 좋게 기모노 입고 가야지?>
마지막은 평소처럼 명랑한 후미에로 돌아왔고,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자리로 돌아와 생각했다. 처음 다이코쿠에 갔을 때였다. 후미에는, 다이코쿠에는 유달리 신사가 많은데, 그 이유는 다이코쿠에 메가마스 본사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었다. 돌이켜보면 메가마스는 공간이 불안정한 장소에 신사를 세워서 서치의 삭제대상에서 제외시키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코일도메인으로 가는 입구를 찾기 위해 일부러 보존한 것이다. 메가옹도 말했다. 공간이 불안정한 곳에만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가 있다고.
그런데 전체포맷에 사용되는 큐브들은 그 영역조차 무시하고 들어가서 공격한다. 코일도메인에 접속할 가능성을 버려가면서까지 포맷하려고 한다니, 그 정도로 지금의 다이코쿠의 공간은 위험하단 말인가.
기차는 점점 산속으로 나아갔다. 눈 풍경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이루히메에 대한 일만을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이루히메에 도착하기까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산간을 빠져나오자 눈은 드물어졌고, 더욱 나아가자 건조한 겨울하늘 밑으로 다이코쿠와 비슷한 분위기로 공장과 맨션이 늘어선 작은 도시가 나타났다. 오후 세 시를 넘기자 겨울의 태양은 크게 기울었다. 이루히메 역에 도착한 때는 거리가 연한 보랏빛으로 물들듯 그늘지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었다.
8개월 전에 나는 이 역에서 다이코쿠행 야간열차를 탔다. 도착한 다이코쿠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이 모든 일이 불과 8개월 사이에 일어났다니 믿겨지지 않았다. 모든 일을 겪고 난 뒤 다시 여기에 덴스케와 단 둘이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여기야.]
웬 여성이 멀리서 한 손을 들며 방긋방긋 나를 보고 있었다. 짙은 감색 런치코트,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있었고, 날렵한 느낌으로 살짝 검게 탄 얼굴을 한 언니였다. 누구지? 이루히메에 살았을 적의 이웃사람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봤지만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했나? 그렇게 생각해서 살짝 돌아보았지만 나 말고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너 말이야, 너. 오코노기 유코 씨.]
시선을 응시하며 빤히 바라보았다.
[하, 하라카와 언니? 하라카와 타마코 언니예요?]
[그래. 잘도 알아봤네. 으이구, 이 귀여운 것.]
자세히 보니 분명히 하라켄의 친척누나인 하라카와 언니였다. 살짝 올라간 큰 눈매에, 가늘지만 살짝 큼직한 입술까지.
[바로 알아보지 못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니? 우린 찐한 사이였잖아.]
뭐지. 언니의 분위기가 변했다.
[언니, 살 빠졌어요?]
[아니, 체중은 늘었는데.]
그랬다.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했던 체격이 든든하게 바뀌었다. 언니는 다이코쿠에 있었을 때 언제나 딱 달라붙는 검은색 라이더슈트를 입고 있었다. 큰 바이크에 걸터앉아 다이코쿠를 질주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었는데도 언니에게서 가녀린 느낌이 났었다. 서치를 조종하여 불법소프트를 단속하는 공격적인 태도도, 헬멧을 벗은 순간 찰랑거리며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을 휘저어 올리는 모습도, 솔직히 말하면 일부러 멋부리는 느낌이 들어서 어색했었다. 자연스러운,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사와의 배타적인 점도 매우 부자연스럽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서투르고 어설펐지만, 언니는 아마사와에게 비하면 어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자기연출이 꼴불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제는 그게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라이더슈트를 입지 않으셨네요...]
[응. 여기서는 바이크를 안 타니까. 이 런치코트는 98사이즈야. 오이마츠 점포에서 세일해서 샀지.]
오이마츠는 이루히메에만 있는 슈퍼였다. 요사이에 체인대형마트에 밀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루히메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지방고유의 이름 있는 가게였다.
[오이마츠는 의류를 다루는 작은 중개업소였어요. 그래서 의류는 세일품목도 질이 좋다고 호평이 났죠.]
[흐으으으음,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언니가 똑바로 내게 다가왔다. 98사이즈 런치코트를 입고 씩씩하게 걷는 언니는 멋있었다. 언니가 내 바로 앞에 섰다. 한 손의 손바닥을 쫙 펼치고는, 내 머리를 꽉 붙잡더니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혼자서 잘 왔구나. 기특하기도 하지.]

[잠깐만요. 언니, 어떻게 여기에 계신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제가 온다는 것을 알았나요?]
[부탁받았거든. 애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그쪽으로 간 거 같으니까 잘 좀 봐달라고 말이야.]
[누구한테요?]
[누구라고 생각해?]
[메가옹. 제 할머니한테요?]
[정답.]
집을 나설 때, 메가옹이 이루히메게 가면 함께 할 안내역을 붙여주겠다고 말했었다. 그게 하라카와 언니였다. 언니가 메과자점의 단골손님이었다는 것은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메가옹과 언니 사이에 교류가 있다면, 하라카와 언니가 이루히메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를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부탁했지.]
또 한 명?
[오코노기 기술장님. 네 아버지 말야.]
엇.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하고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진짜야. 처음에 메가옹에서 연락이 와서 네가 이루히메로 갔다는 거야. 그리고는 전화를 바꾼다고 했더니, 바로 너희 아버지랑 통화했어. 사정사정하시더라고, 몇 번이나, 미안하다, 부탁하네, 정말 미안해, 하라카와, 하고 말하셨어. 기술장님이 얼마나 당황하셨을지 눈에 선하더라.]
[하라카와...? 기술, 장?]
[벌써 잊었어? 내 직장은 공간관리실이야. 메가마스 출장팀이지. 나랑 같은 팀인 네 아버지는 내 직속 상사야.]
그랬다. 아빠와 언니는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빠가 언니에게 나를 돌봐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했다고?
[좋은 아버지구나.]
나는 끄덕였다. 틀렸다. 무엇 하나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울음이 나올 것 같다니. 알고 있었다. 아빠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 역시, 내가 안경으로 단순히 장난질을 한다고 생각해서 나를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었다. 아빠, 미안해. 걱정 끼쳐서 미안해.
언니가 못 본 척 나를 재촉했다.
[자, 서두르자. 먼저 우리 본거지로 가자.]

이루히메에서 언니와 함께 버스에 탔다. 하라카와 언니가 말한 본거지란 하루히사에 있는 피시방이었다. 언니는 거기에서 다른 동료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걔 이름이 네코메야. 네코메 소스케.]
하루히사는 이루히메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걸리는 산간도시였다. 버스가 이루히메를 벗어나자 전속력으로 달렸기 때문에 크게 흔들렸다. 나도 언니도 앞좌석의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네코메 소스케요? 프로토타입 안경을 받았다는 언니 친구요? 결국 그 사람을 찾아냈군요.]
[응. 여러 일이 있었지만 겨우 한 명 찾았어.]
[저는 카지 노부히코와 만났어요.]
하라카와 언니가 나를 보고 크게 눈을 떴다.
[노부히코를? 언제?]
[처음에 메과자점에 왔던 게 한 달 정도 전이었어요. 그 때는 아마사와의 오빠라는 것도 몰라서...]
메과자점에서 일어난 일과 쿄코에 대한 것을 언니에게 조리있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창밖의 풍경이 어둠에 가라앉아갔다. 버스가 하루히사의 상점가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완전히 해가 떨어져 있었다.
그곳은 오래된 찻집이었지만 따뜻하고 청결해서 매우 차분해지는 곳이었다. [배고프지?]하고, 아이라인을 눈꼬리까지 확실하게 그린 풍만한 몸매의 아주머니가 오므라이스를 내어주었다. 화장은 조금 짙었지만 머리카락에 윤기가 흘러서 매우 예뻤다.
문득 유키링을 만나고 싶어졌다. 유키링이라면 분명 이 윤기가 찰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에 즉시 반응했겠지. 그리고는, 샴푸는 뭐 쓰세요? 컨디셔너는요? 라는 식으로, 아주머니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상상하면서, 다 먹고 난 뒤 입을 종이냅킨으로 훔치면서 조금 웃고 말았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내 비스듬하게 앞에서 한참 전에 식사를 마친 네코메 소스케가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짱을 끼며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하게 사과했다. 언니는 네코메 소스케 오빠가 전혀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오빠는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어서 첫인상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그 오빠 곁에는 비슷한 느낌으로 침묵을 일관하는 남자가 있었다.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그 오빠의 이름은 무지카였다.
[자자, 이야기를 종합해보자고.]
내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황급히 언니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마사와를 조종해서 다이코쿠에서 반짝버그를 모은 게 걔 오빠였다는 거지?]
[네. 카지 노부히코예요. 언니랑 오빠와 함께 8년 전에 프로토타입 안경을 받은 사람이죠.]
[노부히코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 오빠랑 만났던 제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 사람은 자기가 특별하다고 자만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었죠.]
[안경을 사용해서 아이들이나 그 가족이나, 메가마스마저도 지배하거나 좌지우지하고 싶다,  그런 의미구나.]
[네. 맞아요.]
제대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언니가 정성껏 고쳐서 내게 재확인시켜주었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숨 돌리고 조금 미소를 되찾았다. 네코메 오빠는 아직도 무서운 얼굴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심각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숙였다. 언니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마사와 유코는 안경이 끝나가고 있고, 이 이상 오빠의 힘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말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오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자신에 절망해서 저쪽세계로 스스로 몸을 던지고 입구를 닫았다...]
나는 끄덕였다. [그 뒤 아마사와네 오빠의 이야기나 여러 사람들의 정보를 통해 몇 가지의 일을 알았어요. 저쪽세계라고 저희들을 부르고 있는 공간의 안에는 코일도메인이라고 하는 특수한 공간이 있는 것 같아요. 거기로 가는 통로를 열기 위해서는 제 할아버지가 개조한 덴스케라고 하는 전뇌펫과, 코일스에서 만든 제 안경이 필요해요. 그 입구가 어디에 있냐는 것이 남은 문제예요.]
[그 공간에 코일스의 극비자료가 숨겨져 있으니 코일스 관계자가 있는 곳이겠네. 그리고 공간이 불안정한 지점이겠고.]
[부탁드려요. 저는 아마사와와 만나서 데려오고 싶어요. 다이코쿠에서는 곧 전체포멧이 실시되니까, 입구를 열어도 공격받으면 위험해요. 하지만 이루히메라면 가능성이 있어요. 단서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계속 여기에서 살았었는데 아무 것도 몰라요. 이루히메의 안경놀이는 다이코쿠처럼 기술력이 필요없는 간단한 놀이 뿐이었고... 게다가 저는 가장 친했던 친구가 안경이 없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안경기술도 한참 낮았어요. 하루히사에서 전뇌사고가 일어났다고 하는 뉴스도 얼핏 알 뿐이고, 그 사고를 둘러싼 안경유랑민과 비안경유랑민이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이곳 사정에 대해서는 네코메 오빠나 하라카와 언니 쪽이 훨씬 더 해박할 거예요. 알려주세요. 여기 어딘가에 입구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알려주세요. 짚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다 좋아요!]
곤란하다는 듯 언니가 오빠를 보았다. 오빠가 팔짱을 낀 채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무지카 오빠가 심기가 불편한 듯 카운터에서 디켄터를 가지고 와 내 잔에 물을 더해 따랐다.
[그 녀석은 물 안 마셔도 괜찮나?] 갑자기 네코메 오빠가 중얼거렸다.
[어?]
오빠의 시선 끝에 덴스케가 있었다. 덴스케는 이루히메로 오자 왜인지 건강해져 있었다. 언니와 버스정류장을 향했을 때에도 내 앞을 앞장서서 걸었고, 지금은 내 발치에서 크게 하품을 하고 뒷발로 귓등을 긁고 있었다.
[물이나 먹이.]
나는 황급히 안경으로 키보드를 열어서 소프트웨어를 실행했고, 전뇌물과 전뇌음식을 클릭해서 불러내고 덴스케용 그릇을 꺼냈다.
보이는구나. 덴스케에게 그릇을 내밀면서 나는 새삼 놀랐다. 네코메 오빠는 덴스케를 볼 수 있었다. 아직 안경이 멀쩡한 것이다. 네코메 오빠는 안경유랑민이라고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진짜를 보았다. 한참 전에 안경이 끝났어야 하는데 아직 안경을 쓸 수 있는 사람.
[안경이 멀쩡하다고 이야기하면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녀석들이 더 많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고통이야. 보고 싶지 않은 것이나 알고 싶지 않은 것도 눈에 다 들어오지. 그게 싫으면 안경을 벗고다니면 될 일이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더군.]
[왜요?]
무심결에 물었다. 다시 째려보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오빠는 몸을 일으키고는 양손을 탁자 위에 겹쳐 세우며 정성껏 설명했다.
[대부분의 초등학생 유저들은 안경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도 끝나간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안경을 안 쓰게 되지. 그렇게 졸업해 가는 거야. 하지만 나는 못 했어. 처음에 보았던 안경의 세계가 너무나도 강렬했으니까.]
[프로토타입을 받았을 때요?]
[아니.]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다시 의자에 기댄 오빠가 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안경세계를 체험한 것은 8년 전에 있었던 이벤트에서의 사고의 뒤였어. 그때까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어. 이해가 돼? 나는 내 친구들이 안경을 쓰고 노는 동안에도 전뇌물체가 전혀 보이지 않았어. 그 사고가 일어난 뒤에 갑자기 보이게 된 거야.]

덜컹, 소리가 났다. 언니가 반쯤 일어나 양손을 푼 오빠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거짓말이지...?]
[진짜야.]
[보이지 않았다고? 회의실에서 처음 프로토타입 안경을 썼을 때는?]
[안 보였어.]
[그 뒤에 다함께 돌아다녔을 때는?]
[안 보였어.]
[신사나 공원을 걸으면서 전뇌지도를 만들었을 때.]
[전혀. 그런 척을 했어. 보이는 척을. 나만 보이지 않다니 좆같잖아.]
[몰랐어...] 하라카와 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진짜로 몰랐어.]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겠지? 그 사실을 알고 이해가 갔을 일이 있었을 거야.]
언니가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받았던 날. 너만 전뇌새에 놀라지 않았어. 그 때 너는, 만들어진 새 같은 건 몇 천 마리를 봐도 시시하다고 말했었지.]
[허세 부린거지.] 네코메 소스케가 미소 지었다. 거기서 분위기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그랬으니 그 사고가 난 뒤 갑자기 안경세계가 보여서 놀랐어. 처음에는 흥분했지만 곧 무서워졌지.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을까.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후로 나는 안경을 계속 꼈지. 안경이 끝나갈 때쯤에서야 갑자기 왜 내게 이런 힘이 생겼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야... 나와 안경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문득 감춰졌던 졸업문집에 게재되었던 오빠의 글이 떠올랐다.
안경을 의심해라. 작문의 마지막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것은 이런 뜻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뜬 힘, 안경과 자신과의 거리를 재기 위해 오빠는 계속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 작문을 쓰고 나서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미안.] 갈라진 목소리로 하라카와 언니가 사과했다. [다 나 때문이야. 네가 유랑민이 된 것도, 아직도 안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오빠도 언니도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물었다.
[무슨 뜻인가요?]
둘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었다.
[8년 전에 이벤트회장에서 사고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그 뒤에도 다른 사고가 있었나요? 언니네 네 명 사이에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언니오빠들은 안경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건가요? 그래서 뿔뿔이 흩어져 버렸나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려. 그 사건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안경에 사로잡혔다는 건 분명해. 하지만 뿔뿔이 흩어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야.]
[전?]
언니가 바로 앉았다. 그리고 또박또박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벤트회장에서 일어난 실신사고의 뒤에 우리들 네 명 사이에는 미묘한 온도차가 생겼어. 실신한 노부히코와 요시후미, 실신하지 않았던 나와 네코메. 우리들은 네 명은 사고의 원인을 파헤치기로 결심했지만, 이미 그 때 우리들의 마음을 제각각이었어. 각자의 안경능력에 차가 발생했거든. 지금 생각하면 알 수 있지. 그 사고가 일어난 뒤에 나는 평범하게 안경을 끝마쳤어. 네코메는 그때까지 전혀 안경능력이 없었는데, 사고가 난 뒤 기능이 작동했지. 아마 노부히코는... 그 사고 뒤에 안경이 고장 났을 거야...]
누나가 직접 물어 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고가 난 뒤 카지 노부히코의 안경에는 문제가 몇 번이나 생겼는데, 그러한 사실을 언니네들에게 숨기려고 했던 행동을 의아하게 여긴 언니네들이 결국 눈치를 채고야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카지 노부히코는 매우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하는 굴욕적인 일을 절대로 싫어할 것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노부히코의 안경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우리들은 마지막 모험을 하기로 했어. 안경 최고의 비밀인 미치코를 불러내자고.]
[미치코라니... 그 미치코요?]
그래, 하고 하라카와 언니가 끄덕였다.
[우리들은 미치코에 대해서 잘 아는 줄 알았지. 안경을 쓰고 다니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미치코가 곁에 있었어. 미치코에게 안내를 받아, 안경 안에 있는, 아직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가보자. 거기에는 우리들이 알고 싶어했던 안경의 비밀도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왜 그랬을까... 어쨌든 그 날 우리들은 카야노 신사의 경내에서 처음 통로를 열었어.]
나 하라카와 타마코는 그 때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카야노 신사를 고른 이유는 그 곳에서 미치코와 만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은근히 곁에 있는 미치코를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우리가 불러내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불안했다. 가장 침착하지 못했던 사람은 노부히코였다. 노부히코는 [어서 하자.]하고 오자마자 말했다. [엄마가 걱정하니까 빨리 돌아가야 해.]
노부히코의 어머니는 노부히코를 끔찍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작년에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도, 병원으로 실려 간 노부히코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네코메와 요시후미는 평소와 변함이 없었지만, 네코메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고, 요시후미는 다소 피곤해보였다. 네코메가 긴장한 이유는 잘 이해가 갔다. 당시의 네코메는 안경초심자였다. 우리들이 한참 전에 체험해서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이것저것을, 네코메는 그 때는 처음 체험해보았기 때문에 겁이 났을 것이다. 왜 안경능력이 뒤늦게 자신에게 생겨난 것인가.
우리들은 암호라고 하는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때때로 안경을 사용해서 모험을 하다가 엄청난 양의 숫자와 기호의 나열을 접해본 적이 있었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이 전뇌공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것 같다고 여겨졌다.
암호는 안경을 개발한 기술자들이 전뇌공간에 접속하기 위한 프로그램임에 분명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용자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노는 것뿐만이 아니라 암호를 이용해서 우리들도 전뇌공간을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은 날을 잡아 시험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암호에 의한 의식은 몇 번이나 실패했다. 노부히코의 초조함은 최고조에 달했다. 어린 여동생이 노부히코를 만나러 왔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아마사와 유코였다. 여동생이 모습을 보이자 노부히코가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부히코가 혼잣말을 하듯 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강하게 뜨거운 것이 터져 나왔다.
경내의 바닥에 빼곡하게 기록한 암호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피어올랐고, 우리들은 눈부심에 눈을 감았다...

[미치코는요? 나타났나요?]
오코노기 유코가 몸을 일으키며 내게 물었다.
[그래.] 나는 끄덕였다. [하지만 나타난 것은 미치코 뿐만이 아니었어. 시도를 한 곳은 바깥이었는데 마치 밀실에 갇힌 것처럼, 우리들은 시커먼 공간에 서 있었어. 그리고 거기에 흐느적흐느적하면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어.,, 뭐지? 일리걸? 그것들은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왔어...]
눌이었다. 눌은 전뇌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일리걸이었다. 눌에게 닿으면 전뇌체가 저쪽세계로 끌려가, 두 번 다시 이쪽세계로는 돌아오지 못한다.
[녀석에게 닿았을 때의 감촉이 엄청났어. 아주 살짝 닿았는데 온몸이 근질거리렸지. 와글와글 거리는 간지러움일까.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빨러들어가는 느낌이었어... 하지 마. 이거 놔! 우리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지. 처음에는 애들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금방 흩어져버렸어. 누구도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도 않았고 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 누가 내 이름 정도 불러주었다면 힘이 났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했어.]
나중에는 무아지경이었다. 물이 없는 풀장에서 물에 빠진 것도 아닌데 숨을 쉬지 못하는, 어ㄸ?ㅎ게 할 방법도 없이 정체모를 고통이 영원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발버둥치고 발버둥 쳐서 현실의 세계에 간신히 도착한 나는 한숨 돌린 뒤 그대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길게도 잤지.]
언니는 깍지를 끼고 그 위로 턱을 올려놓고, 한 점을 응시하며 말하고 있었다. 언니의 시선 끝에는, 지금도 언니를 괴롭히는 그 어둠이 있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 잠은 시간을 멈추게 해주었을 뿐이었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도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어. 나는 계속 잤어. 어떡하면 좋아. 눈을 감은 채 어찌할 바를 몰랐어. 더 이상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어. 눈을 뜨고 극복할 힘 같은 건 더 이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아... 어쩌지?]
언니는 계속 말했다. 우리들이 가게에 있는 사이에 몇 명의 손님이 오갔다. 어느 사이엔가 밤은 깊어져 있었다.
[불안해서 눈물이 흘렀어... 그 때였지.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주었어. 괜찮아, 하고 말이야. 크고 따뜻한 손이었어. 몸 깊은 곳에서 엄청나게 큰 힘이 샘솟더라. 괜찮아, 그 말이 눈을 뜰 용기를 주었어. 세 번째로 괜찮아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눈을 떴어. 메가옹이 내 손을 꽉 쥐고 계셨어.]
[할머니가요?]
언니가 끄덕였다. [메가옹은 대단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기서 처음으로 언니가 즐거운 듯 웃더니 검지로 내 이마를 살짝 찔렀다.
[우리들이 눈을 떴을 때에는 병원이 아니었지.]
언니에게 재촉받듯 네코메 오빠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거기는 코일스 시설의 한 구역으로 카야노 신사의 여기저기에서 안경을 쓴 채 쓰러져 있던 우리들과 노부히코의 여동생이 그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어. 한 명 한 명 따로따로. 아마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났을걸. 하지만 연구시설과 내게 향해지는 연구원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날 밤 거기를 떠났어.]
[시선?]
[관찰하더군. 그 사람들은 명백하게 나를 실험대상으로서 감시하고 있었지. 말로는 기분은 어떠냐면서 신경써주는 척 했지만, 본심은 내 몸 상태의 회복에 있지 않다는 것은 바로 알았어. 기분전환하려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감시가 붙어있었어.]
[무엇을 관찰하려고 했던 걸까요?]
[모르겠어. 몇 번이나 물어도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더군. 부모님도 친구들도 선생님도 찾아오지 않았지. 이유도 묻지 않고, 매일매일 뇌파를 측정하고 주사를 맞았어. 그것이 카야노 신사에서 우리들이 저지른 짓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 무시무시한 체험의 무엇을 조사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 내가 누구보다도 그 체험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고.]
[내가 눈을 뜬 것은 그보다 뒤야.] 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가장 마지막이었을걸? 그 때는 이미 나 말고는 아무도 시설에 없었을 거야. 눈을 뜨고 비교적 빨리 집으로 되돌려보내졌어. 그 뒤에 우리들은 서로 만나지 않게 되었어.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니까, 만나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는데도 말야... 그러다가 요시후미가 사라졌어. 그렇게 우리들은 안경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지.]
[안경에 문제가 생긴 거야. 당시 판매되던 코일코일스 제품에는, 우리들이 받았던 프로토타입을 포함해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어. 그래서 두통이 나고, 실신소동이 일어나고, 결국에는 우린 카야노 신사에서 그 꼴을 당했지. 코일스는 은폐하려고만 했어. 당시에 코일스는 메가마스에 인수되려고 했었거든. 인수되는 데에 불리한 사실이 생기면 안 되니까, 코일스는 안경 사고를 최대한 파묻으려고 한 거야.]
오빠가 격하게 분개하듯 말했다. 그건 좀 말이 심했다, 라고 하듯 언니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단념한 듯 자리에 바로 앉아 침묵했다.
나는 오빠의 아버지가 메가마스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빠는 코일코일스의 부장님이었다고 한다. 코일스가 메가마스에 흡수된 뒤에도 높은 지위를 유지한 채 메가마스에서 근무하고 있다. 오빠의 분노는 그것에 관계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코일스가 팔리고 코일스가 가진 안경기술은 메가마스로 이어졌지. 그 때 코일스에서 메가마스로 이직한 부장님에게 권유받아서 나는 메가마스에 입사했어. 그 때와 같은 안경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서치로 일리걸을 삭제하는 부서에 들어갔지. 다른 세 명은 뭐하고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다이코쿠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어.]
[하지만 언니의 근무처는 공간관리실이잖아요? 친구들이 결함이 있는 프로토타입 안경을 가지고 흩어졌으니까, 조금만 조사해보면 행방정도는 금방 알 수 있지 않았나요?]
[물론 조사했어. 계속 추적했지. 조사한 결과 네 대 중 한 대는 완전히 반응이 없었어. 완전히 끝장이 난 거지. 남은은 세 대야. 한 대는 내가 가지고 있어. 다른 한 대는 네코메. 그리고 남은 한 대는 올 여름부터 갑자기 다이코쿠에서 반응이 나타났더라.]
아마사와였다. 아마사와가 오빠로부터 물려받았은 프로토타입 안경이 7년 전에 뿔뿔이 흩어진 세 대 중 한 대였다.
[결국 박살난 것은 요시후미의 안경이네. 요시후미가 사라진 건 그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몰라.]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휘저어 올리며, 생각에 잠긴 눈초리로 언니가 중얼거렸다.
[야사코.]
오빠가 나를 보았다. 엄하고 똑바른 시선이었다.
[네가 아마사와 유코와 만나서 구하려는 심정은 잘 이해돼. 하지만 나는 간단히 널 협력할 수 없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양 무릎에 올려놓던 손에 힘을 주었다.
[눌은 위험해. 너 역시 한 번 저쪽세계에 들어가 봤으니 알지? 그런 위험한 곳에 너를 보낼 순 없다. 게다가 아마사와 유코는 제 발로 저쪽으로 뛰어든 거잖아?]
그 말대로다. 그 말을 들은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졌다.
[하루히사의 전뇌사고로 많은 유저들의 전뇌체도 저쪽세계에 갇혔어. 나는 현재 타마코와 현지의 유랑민들과 함께 전뇌체를 되찾기 위해 활동하고 있어. 왜 우리들이 그렇게 필사적인지 알겠냐? 그 사람들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았다. 슬프지만, 분하지만, 그 말대로다.
[지가 좋아서 그렇게 된 녀석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라도 빌려주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한 오빠는 잔의 바닥에 조금 남아있던 물을 모두 마셨다.
리클라이닝 시트에서 몸을 일으키고 덮고 있던 담요를 젖혔다. 정성껏 가지런히 접었다. 눈앞의 커튼을 들추자 밖은 새하얗게 흐렸다. 밖의 경치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는 것을 알았다.
체크무늬 목도리를 둘둘 감고 더플코트를 입었다. 부스 구석에 나란히 놓인 신발을 신고, 탁자에 올려놓았던 안경을 쓰자 발밑에서 덴스케가 머리를 쳐드는 것이 보였다.
가자, 덴스케. 나는 일어났다. 덴스케가 대답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지가 좋아서 그렇게 된 녀석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라도 빌려주고 싶지 않다.>
네코메 오빠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대로다. 아마사와는 자기 발로 저쪽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런 사람과 만나서 이쪽세계로 데려오고 싶다니, 괜한 참견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 하지만 나는 역시나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아마사와가 고통 받으면 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와 아마사와는 고통이라는 실로 그 무엇보다도 강하게 이어져있다.
피시방에서 나오면서 옆 부스를 들여다보았다. 하라카와 언니는 푹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몰래 빠져나오는 것을 네코메 오빠나 무지카 오빠에게 들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가게 직원이 세면장 청소를 하러 간 것을 확인한 뒤, 소리를 죽이고 피시방에서 나왔다.
하루히사는 광활한 동쪽 일대를 점하고 있는 이루히메시의 산간지역이었다. 내가 살던 이루히메의 동네와는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시였기 때문에 하루히사 초등학교에는 몇 번인가 가본 적이 있었다. 합동 역전 릴레이 대회(일본에서는 기차역을 통과점으로 하여 마라톤을 하는 대회가 다수 개최되고 있다/역주)나 수영경기 등등이 개최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길은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하루히사 초등학교는 원래 코일코일스의 회사빌딩이 있던 장소라는 것을 피시방에서 조사해보고 알았다. 그래서 전뇌사고가 하루히사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곳에 코일스가 열었던 입구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분명 아마사와와 같이 이마고를 가진 아이의 힘에 반응해서 불안정했던 공간이 크게 열린 것이다.
입구는 하루히사 초등학교에 있을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본 적이 있는 교문 앞으로 나섰다. 어쩌지. 문이 굳게 닫힌 것을 확인하고는 조금 생각한 뒤에 타고 넘어가기로 했다.
발아래를 확인하면서 철제 격자교문을 기어올랐다. 문 꼭대기에 걸터앉아 건너편으로 착지점을 찾아 용기를 내어 단숨에 안으로 뛰어내렸다. 컴퓨터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불안했지만, 운동장을 돌파하여 학교 앞에 서자 괜한 걱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건물의 한 구역에는 밤눈에도 뚜렷하게 보이는 푸른 비닐시트로 뒤덮여 있었다. 비닐시트는 한밤중의 냉기바람에 날려 퍼덕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루히사 초등학교 컴퓨터실. 작년 봄에 전뇌사고가 일어났다고 하는 현장이었다. 살짝 비닐시트를 젖히자 그 너머로 매우 평범한 교실이 있었다. 건물에는 아무런 손상도 없었다. 교실에서 직접 운동장으로 출입할 수 있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당겨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겨있었다.
옆으로 나란한 유리창을 한장 한장 확인하고, 가장 덜겅거리며 흔들리는 창문을 떼어내기로 했다. 엄청 무거울 줄 알았는데, 마음먹고 양끝을 들자 의외로 쉽사리 문이 떼어졌다. 떨어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닥에 세우고, 창틀을 발판으로 해서 교실로 들어갔다. 안은 폐허였다. 책상도 의자도 교탁도 없었다. 텅 빈 동굴 같았다. 기온 때문이 아니라 추위와는 다른 냉기가 등골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이곳은 위험하다. 양발을 바닥 위에 댄 순간 그런 실감이 들었다. 다음으로 뛰어 들어온 덴스케도 바로 [으르르.]하고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틀림없었다. 이곳이 입구다. 하지만 한없이 위험한 곳이었다.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오라로 충만해 있어서, 서 있는 것도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곳에 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한 게 터무니없는 잘못이었다. 위험하다. 나는 가장 와서는 안 되는 곳에 서 있었다.
덴스케가 보이지 않았다.
[덴스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덴스케의 귀만이 어두침침한 속에서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뇌안개였다. 전뇌안개가 덴스케의 몸을, 내 발목을 뒤덮고 있었다.
[덴스케, 도망치자.]
황급히 들어온 창문 쪽을 돌아본 순간, 교실 전체가 오렌지 빛에 물들었다. 여름날의 저녁노을과도 같은 이 색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집에 저쪽세계로 가는 통로가 열렸을 때, 쿄코가 끌려가버렸던 그 때와 같은 색의 오렌지 빛이었다.
안경과 덴스케에게 공간이 반응하고 있었다. 미묘한 균형으로 성립되고 있던 공간이 무너지고 커다란 구멍이 뚫리려고 했다. 창문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이곳은 교실이 아니었다. 우리는 오렌지 발광체 속에 있었다. 저편에서 점점이 검은 형체가 솟아나 우리들을 향해 팔을 뻗어왔다.
[덴스케, 어서!]
나는 덴스케를 불렀다. 전뇌안개 속에서 덴스케를 끌어안았다. 사방에서 검은 형체, 눌이 우리들을 포위하여 덮쳐왔다.


제4장 돌아서, 그리고 오르다

나와 덴스케는 바닥에 바짝 웅크렸다. 눌에게 닿으면 전뇌체가 끌려가버린다. 저쪽세계에는 다양한 공간이 있는데, 블랙홀처럼 전뇌체를 빨아들이기만 하는 질 나쁜 낡은 공간이 있으면, 아마사와가 있을 코일도메인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실험공간도 있었다.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은 나쁜 공간이었다.
한 기의 검은 형체가 소리도 없이 내게 다가왔다. 덴스케를 끌어안은 채 꽉 눈을 감았다. 덴스케는 지켜야한다. 내 전뇌체가 끌려가버린다고 해도, 덴스케가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아마사와가 있을 저쪽세계의 코일도메인에 접속해 꺼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것이 어깨에 닿았다. 따뜻한 것? 이상하다. 나는 눌에게 닿은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감촉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한 듯,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어깨에서 닿는 감촉은 달랐다. 몸 깊숙이 데우듯 물씬 상냥한 무언가가 퍼져갔다.
나는 살짝 눈을 떴다. 주위는 아직도 오렌지 빛에 감싸여 있었다. 각오하고 얼굴을 들자 무수히 많은 검은 형체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비명을 지르며 덴스케를 끌어안은 채 뒤로 뛰어 물러났다. 동시에 내 어깨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무심결에 돌아보자 바로 옆에 눌이 있었다. 나를 덮치려고 하는 다른 눌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나와 비슷한 키였다. 보통 눌들은 올려다봐야할 정도로 키가 큰데.
등 뒤에서 몰래 다가오는 눌을 피해서 교실 안으로 들어가 작은 눌을 관찰했다. 작은 눌은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저 내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눌이 공격해올 때마다 그 앞을 가로 막아섰다. 마치 나를 눌의 공격에서 지키기 위한 것처럼 말이다.
[누구야?]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 질문이 나왔다. 물론 알고 지내는 눌은 없었다. 그럼에도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누구야?]
안 돼. 그렇게 들렸다.
오면 안 돼. 이번에는 뒤에서 들렸다. 황급히 돌아보자 내게 무작정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 눌이 또 하나 있었다. 목소리는 그 눌에게서도 들려왔다.
[이 교실을 떠나서 저쪽세계로 가면 안 된다는 거야? 아니면 여기에 와서는 안 된다는 거야?]
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멀어져갔다.
[기다려. 여기가 안 된다면 어디로 가야해?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는 어디에 있니?]
무수한 눌들 중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흔들리고 있는 것도 있으면, 무작정 내게 접촉하려고 공격해 오는 것도 있었다. 이것은 대체 무슨 일일까? 눌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이나 사념을 지닌 최악의 전뇌생물이자 일리걸인데. 왜 나를 공격하지 않는 눌이 있는 거지? 왜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하는 거지?
[알려줘.]
오렌지 색 안에서 새로운 형체가 떠올랐다. 흐릿한 윤곽의 새로운 형체는 내게 다가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돌아서, 그리고 올라가.
[돌아서... 올라가?]
새로운 형체가 끄덕이듯 위아래로 줄어들었다가 커졌다. 그에 반응하듯 나를 공격하지 않던 눌들이 흐느적흐느적 흔들렸다. 순간, 빠직 내 등골에 전기가 통과했다. 내게 속삭이는 목소리의 주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타라였다. 틀림없다. 조금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 이것은 타라의 목소리였다.
[타라!]
덴스케를 끌어안고 오렌지 빛 속에 있는 형체를 향해 달렸다.
아차!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한 기의 눌이 나를 향해 팔을 크게 휘둘렀다. 하얗고 얇은 막이 쳐졌다. 그렇게 보였다. 자세히 보자 셸터였다. 보호막이 나와 덴스케를 뒤덮었고, 눌의 팔이 튕겨졌다. 다음 순간 눈부신 빛이 작렬했다. 눌이 빛에 튕겨져 뒤로 날아갔다. 메타태그가 발사되었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너무나도 끔찍한 소리가 고막을 찢었고, 나는 그만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주위는 다시 어둠에 둘러싸였다. 겨우 귀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얼굴을 들자, 나는 원래의 교실로 되돌아와 있었다. 내 앞에는 관리안경을 쓴 하라카와 언니가 서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전세탁소라는 곳에 와봤다. 물론 그런 곳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상점가를 지나다가 본 적은 있었지만, 안에 들어간 적은 처음이었다. 가늘고 긴 형광등이 차갑게 가게 안을 비추고 있었다. 역시 밤늦은 이 시간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한 대도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녹색 엉덩이받이의 둥근 의자가 몇 개 대충 놓여있었고, 나, 하라카와 언니와 네코메 소스케 오빠는 거기에 앉아있었다.
[교실 뒷정리는 무지카가 해주고 있다.] 오빠가 말했다. [걔는 안경이 끝났기 때문에 아무리 불안정한 공간에 있어도 저쪽세계로 끌려갈 일이 없어.]
오빠는 화내거나 고함을 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머리가 안으로 움츠러들어갔다.
[죄송해요.]
[메가옹한테서 전화가 왔어. 밤이 늦어서 네가 자고 있으려니 싶어서 나한테 걸었었나봐. 메모를 남기고 네가 자던 옆 부스를 엿보았더니 네가 없어졌더라고.]
언니가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오빠가 이었다.
[네가 하루히사의 전뇌사고현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장 알기 쉬운 곳이니까. 그 컴퓨터실은 코일스가 망하고 그 부지를 시가 사들여서 초등학교를 세운 곳이야. 인터넷에서 조사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내용이지. 너라면 금방 알아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래도 이런 늦은 시간에 혼자 뛰쳐나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그냥 밤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만약 정말로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가 열리면, 다른 사람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입구가 아니야. 너 설마 그런 곳이 코일도메인으로 가는 접속지점일 줄 알았냐. 사고가 터져서 낡은 공간이 쏟아져 나온 뒤에 전혀 복구되어 있지 않은 곳이야. 기술자들이 열심히 시도를 해보고는 있지만, 아직도 위험한 출입금지구역이다.]
나는 끄덕였다. 교실에 들어간 순간 바로 알았다. 여기가 아니다, 아마사와에게 갈 수 있는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가 없다고.
[보통은 눌은 공격만 하는데요...]
툭 말했다. 아무리 질책 받아도 두 사람에게 꼭 묻고 싶었다.
[이상했어요. 공격하지 않는 눌이 있었어요.]
공격하지 않는 눌? 팔짱을 끼던 오빠가 미간을 좁히고, 무슨 말이지? 라며 나를 보았다.
[저랑 비슷한 키의 눌이 있었는데, 다른 눌에게 공격받던 저를 지켜주었어요. 이상하죠? 눌은 사람의 증오나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전뇌실체화 되어서 저쪽세계에 눌러 붙은 전뇌유령이잖아요? 실제로도 제가 지금까지 보았던 눌은 다 그랬죠. 전뇌체를 노리며 좀비처럼 달려드는 공격적인 최악의 일리걸이죠. 그런데 오늘 제가 만난 눌은 겉모습은 비슷했지만 성격이 좀 달랐어요... 뭐랄까, 저희들과 아주 비슷하다는 느낌이랄까?]
언니와 오빠가 얼굴을 마주보았다. 둘 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그 때였다. 언니의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고 바로 받아서 [여보세요?]하고 언니가 대답했다. 그리고 두세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언니가 내게 말했다.
[메가옹이야.]
[할머니?]
[다이코쿠에서 조사한 내용을 직접 네게 전해주고 싶대.]
언니가 전체모니터로 바꾸었다. 그러자 <안뇽, 안뇽?> 메가옹의 조금 높은 쉰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였다. 헤어지고 나서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그리웠다.
<밤새도록 안 자는 못된 아이는 무사한 모양이구먼.>
나는 끄덕이며 작게 언니오빠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메가옹에게 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덕분에 전화를 두 번이나 해야 했잖는고. 알겠느뇨? 아까 타마코에게는 말해두었다만 네게도 직접 말해주마. 영감의 서재를 조사해보았거늘...>
할머니의 전화는 그 조사 보고였다.
<영감의 연구내용을 일부 알아냈다. 원래는 코일코일스에서 시작되었다. 일찍이 코일스의 한 기술자가, 양자회로가 있는 특수한 기반패턴이 과거에는 없었을 정도로 고성능의 안테나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덕에 미약한 전자파로도 고속통신이 가능하게 되었고, 전뇌안경이라고 하는 혁신적인 통신기반 컴퓨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기반패턴은 주로 열세 살 이하의 아이에게만 작용했거늘.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코일스는 그대로 전뇌안경제조를 단행했다. 경영상태가 각박했기 때문이었거늘. 기사회생을 노리고 내놓은 전뇌안경은 크게 성공하고 대량생산이 되었는데, 아이들을 모니터링하다 보니 회로에 전자파 이외의 다른 것이 수신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고 하더라...>
[전자파 이외의 다른 것요?]
<인간의 의식이다.>
알쏭달쏭해하는 내게 언니가 옆에서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전뇌안경의 통신회로에는 음성이나 영상의 데이터뿐만이 아니라 유저의 의식이 함께 전송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진거야. 전송되는 의식의 양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었지만.]
[아마 회로에 편승하게 쉬운 의식과 그렇지 않은 의식이 있었겠지. 사람 고유의 체질도 작용했는지도 몰라. 노부히코나 요시후미가 빈번하게 두통을 느끼고 있던 것도 관계가 있었을 거다. 안경이 작동하지 않는 나나 의식이 안경의 전자파를 타기 어려운 체질의 타마코는 두통을 느끼지 않았지.]
그러고 보니 아마사와도 머리가 아프다며 보건실에서 종종 쉬곤 했다. 그것도 역시 안경이 원인이었던 것인가.
<통신회로로 사람의 의식이 전송되는 것을 안 코일스는, 반대로 회로를 통해 유저를 향해 어떠한 정보를 주입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 그 실험을 위해서는 수많은 아이들을 모을 필요가 있었거늘. 코일스는 안경이벤트를 개최하고, 그곳에서 안경유저들에게 전뇌의식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사고가 터졌다. 8년 전에 안경이벤트 회장에서 아이들의 대량실신사고가 일어났다. 안경을 통해 아이들의 의식에 의도적으로 작용을 가한 코일스의 실험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실신소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실험의 성공이었거늘. 코일스가 송신한 신호를 아이들의 뇌가 제대로 수신했다고 하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어찌하랴... 대량실신이었거늘. 실험은 성공했지만 코일스의 신용은 급락하고, 결국 신흥 전뇌기기 생산기업으로 주목을 받던 메가마스에게 인수되었다. 그 때 코일스는 그 실험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자료를 모두 은폐했거늘.>
[할어버지는 자료를 알아내려고 하셨던 거였군요.]
<그렇다. 하지만 그게 다 일리가 없다. 코일스의 자료를 찾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일부러 사적인 코일스노드를 만들 리가 없을 텐데.>
[코일스... 노드?]
<덴스케 말이다. 직접 코일도메인을 열기 위한 열쇠지. 영감은 영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열쇠를 만들었다.>
코일도메인에 접속하기 위한 특별한 열쇠, 덴스케.
<왜 그렇게까지 해서 코일도메인을 보존해 두었을꼬? 영감은 코일 도메인을 사용해서 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단 말일꼬? 조사는 계속 할 것이니라.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면 바로 연락하마.>
[메가옹.] 언니가 불렀다. [야사코가 하루히사의 사고현장에서 신기한 눌과 만났대요. 공격하지 않는 눌이 있더래요.]
<무어라?>
[정말이에요.] 의욕적으로 나도 이었다. [저를 구해주려고 하듯이 다른 눌이 공격해오니까 막아주었어요. 그런 건 처음 봤어요. 그게 대체 뭐죠?]
<눌이란 본디 눌캐리어라고 하는 코일스가 만든 승차수단이었거늘.>
눌캐리어? 뒤이어 언니가 설명을 해주었다.
[눌은 본래 저쪽세계에서 정보를 빼내기 위한 탐색기였대. 그러다가 통신회로를 이용해서 저쪽세계로 의식을 보내기 위한 전뇌승차수단으로서도 사용하게 되었다는 거야.]
아하. 눌에게 닿으면 저쪽세계로 전뇌체가 끌려가고 마는 이유는, 애초에 눌이 저쪽세계와 이쪽세계를 오고가기 위한 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벤트 때 시도한 실험으로 급격한 부하게 걸렸는지 일부의 눌이 폭주해서 야생화했다. 결국 코일스가 자료를 묻고 그것을 연구하던 영감도 죽자, 눌은 완전히 저쪽세계에 갇혀서 매우 희미하게 접촉해 오는 감정, 주로 강한 고통, 슬픔, 원한 따위를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부정적인 사념에 지배되었고, 그렇게 전뇌세계의 생물로서 성장하고 만 것이거늘.>
[그럼 제가 만났던, 저를 공격하지 않은 눌은 원래의 눌에 가까운 것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구나.>
[다른 가능성은요?]
<새로운 눌이니라.>
할머니의 말에, 나도 언니도 오빠도 긴장하고 가만히 침묵했다.
<저쪽세계나 눌에 관한 것을 전혀 모르고,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저쪽세계로 빨려들어간 전뇌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고 같은 것으로 말이다.>
나는 칸나를 떠올렸다. 칸나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하라켄이 저쪽세계에 들어갔을 때 칸나는 하라켄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분명히 칸나였다. 결국 하라켄은 칸나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눌들은 아직 저쪽세계에서의 지낸 날도 짧기 때문에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겠거늘. 그래서 이쪽세계에서 찾아온 네게 공감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먼...>
가슴이 아파졌다. 그런 건 싫다. 눌이 못된 짓만 하고 다닌다면 속 편한데. 나쁜 일리걸만 있다면 미워하기만 하면 걱정할 일이 없었을텐데.
갑자기 큰 하품소리가 들렸다. <아이구야, 졸리다.> 진심으로 졸린 듯한 메가옹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슬 자야겄다. 오늘은 새벽 일찍 일어났으니 말이다. 내일은 후미에나 다이치를 불러서 다시 자료를 조사해야겠거늘.>
[고마워요, 메가옹. 안녕히 주무세요.]
통화가 뚝 끊기자, 우웅 하고 형광등이 낮게 우는 소리가 동전세탁소로 돌아왔다.
[그럼.]
오빠가 발을 반대쪽으로 다시 꼬며 고쳐앉았다. [야사코.] 오빠가 나를 불렀다.
[저녁에 이야기했을 때, 네가 아마사와 유코와 만나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나는 쉽사리 너를 돕지 않겠다고 말한 거 기억하나?]
나는 끄덕였다. 넌지시 꾸지람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하루히사 초등학교에서 언니에게 이끌려 돌아온 나를 오빠는 줄곧 동전세탁소에서 기다려 주었다. [피시방에서는 할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래.] 이게 이유였다. 다이코쿠와는 다르게 작은 지방도시인 이루히메시에서는 밤늦게까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더욱 외곽에 있는 하루히사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24시간 운영하는 동전세탁소라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 준 것이었다. 그런 작은 배려가 기뻤다. 대단히 성실함이 느껴졌다. 이런 사람에게라면 혼나도 좋았다. 혼나도 당연했다.
[나는 이렇게도 말했지. 자기가 원해서 그렇게 된 녀석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라도 빌려주고 싶지 않다고. 그랬지?]
나는 다시 끄덕였다.
[그래도 넌 끝까지 이 동네에서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를 찾을 셈이냐?]
나는 얼굴을 들고 오빠를 보았다. 그리고 언니를 보았다. 그러고는 [네.]라고 말했다.
[저는 전에 한 번 친구의 손을 뿌리친 적이 있어요. 이루히메에서요. 언니나 오빠가 들으면, 뭐야, 겨우 그런 일이냐고 비웃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애랑은 아주 사이가 좋은 친구였고, 저는 어느 날 그 친구의 다리에 잔뜩 멍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거 왜 그런 거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걔가 엄청 당황해하더니 저를 노려보고는... 그러고는 없어졌어요.]
[멍? 무슨 병이야?]
[아뇨.]
즉시 나는 부정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네, 구타를 당했나 봐요.]
말을 끝마치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계속, 계속 말하고 싶었던 한 마디였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한 마디였다.
[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그러면 누구보다도 타라가, 걔가 싫어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잘못 본 거다, 착각이다, 그렇게 믿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타라는 결국 그날을 마지막으로 없어지고, 잠시 뒤에는 멀리 이사간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어요. 저는 정말로 멀리 떠나기 전에 타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잖느냐, 내가 도와줘야만 했잖느냐, 그런 생각이 들면 슬퍼져서 억장이 무너져서...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타라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는 사이에 저는 다이코쿠로 이사를 가게 되었죠.]
타라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쿄코가 저쪽세계로 들어간 것이 계기였다. 눌에게 이끌려간 쿄코를 메과자점의 비밀계단을 통해 간신히 데리고 돌아왔을 때, 희미한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코노기, 유코야. 그것은 틀림없이, 타라의 목소리였다.
[저쪽세계에서 들렸다고?] 언니가 물었다.
[네.]
[그럼 그 애의 전뇌체도 저쪽세계에 갇혀있다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닐 거에요.]
[왜 그렇게 단정하지?]
[타라는 안경이 없었거든요.]
[안경이 없다고?]
놀란 듯 언니가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가난해서 부모님이 사주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도 타라와 놀 때에는 항상 안경을 벗었어요. 타라와는 종종 함께 있었으니까, 이루히메에 있었을 때는 전 안경을 쓰고 다니는 일이 적었어요.]
다이코쿠에 이사왔을 때, 아마사와나 후미에가 내게 안경능력이 없는 것을 어처구니 없어했었지만, 그때까지 안경을 최대한 활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타라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저를 지켜주었던 눌들 중에 하나가 타라의 목소리로 말했어요.]
말도 안 된다며 오빠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안경이 없는 애가 저쪽세계로 전뇌체를 끌려가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아마도 네가 그 타라라는 애의 목소리라고 착각한 거 아냐?]
[아뇨! 그렇지 않아요! 왜냐면 타라가 돌아서, 그리고 올라가라고 말했었다고요.]
돌아서, 올라가라. 무슨 뜻일까. 입으로 말하면서도 말의 의미가 알쏭달쏭했다. 하지만 타라는 분명히 내게 그렇게 말했다.
돌아서, 올라가라.
[믿어주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죠... 안경이 없는 타라가 왜 그런 곳에 있었는지는 저로서도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안경이 없는 타라도, 안경유저인 아마사와도, 저쪽세계에 반드시 있어요. 타라가 제게 메시지를 전한 이유는 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마사와가 제 발로 저쪽세계로 뛰어든 게 분명하지만, 이쪽세계의 삶을 포기했기 때문은 아니예요. 살기 위해서 라고요. 어딘가에 반드시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마사와가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를 열었던 게 분명해요. 제가 아는 아마사와는 그런 애예요.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여자애였어요. 역시 저는 아마사와랑 타라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요. 만나서 이쪽세계에서 함께 놀고 싶어요.]
길고 긴 틈이 생겼다. 누구도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형광등의 푸르스름한 빛이 콘크리트 벽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빠가 입을 열었다.
[저쪽세계에 있었다고 한다면, 걔는 어딘가에서 안경을 구했다는 뜻이겠지. 혹은 그것에 가까운 것을 손에 넣었다거나.]
메가옹이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코일스노드요? 코일도메인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무언가를 타라가 가졌다는 건가요?]
[안경조차 없는 애에게는 코일스노드가 있다고 한들 무리겠지. 단 걔한테 이마고가 있었고, 나아가 누군가에게 코일스노드를 받았다면, 안경이 없어도 걔의 전뇌체는 코일도메인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야. 즉, 누군가가 저쪽세계로 그 애를 보낸 거야.]
[보냈다니...] 나는 엉겁결에 일어나 오빠의 어깨를 흔들었다.
[누가요? 왜요?]
오빠는 내 손을 뿌리치려고 하지 않고, 톡톡 두드리며 달래듯 살며시 떼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지. 하지만 메가옹이 말했지? 오코노기 선생님이 코일도메인을 사용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그 대답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라.]
오빠가 똑바로 나를 보았다.
[어쩔 거냐. 다이코쿠로 돌아갈 거냐?]
[다이코쿠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듣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왜요? 전 여기 온 지 하루도 안 지났어요!]
[저쪽세계로 가야하잖아.] 차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열을 띈 것도 아닌, 매우 자연스러운 어조로 오빠가 말했다. [가고 싶잖아?]
[가고 싶어요.]
[이루히메에는 갈 방법이 없어. 다이코쿠에 돌아가 다른 입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안 돼. 얘가 다이코쿠에서 저쪽세계로 들어가 있는 사이에 전체포맷이 실시되면 어쩌려고? 이쪽세계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잖아.]
[아니, 타라라고 하는 애가 그 안에 있었다면 그 애의 링크를 따라가면 다른 출구를 통해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몰라. 물론 거기도 운 좋게 전체포맷을 피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이야기지만. 물론 아마사와 유코의 링크를 따라 돌아올 수도 있어.]
엄청난 속도로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일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다이코쿠에 돌아간다.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는 거기밖에 없다. 이루히메에는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 파앗, 하고 머릿속에서 작은 불이 켜지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딱 한 군데만 더 확인해 봐도 될까요?]
[어디?]
[이루히메요.]
[짚이는 곳이 있니?]
[모르겠지만... 하지만 혹시...]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풀의 냄새가 되살아났다.
[거기라면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어딘데?]
언니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돌아서, 그리고 올라가는 곳이요.]
그 날은 매우 맑았다. 연한 파랑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서 산속의 맑은 호수 같았다. 어제는 하루 종일 언니와 오빠한테 주의사항이나 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대처법 등을 배웠다. 절대 깊이 들어가지 말 것.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올 것.
[너만 무사하면, 다시 언제든지 저쪽세계로 접속할 수 있어. 한 번에 다 처리하려고 하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재빨리 튀어. 알았지?]
오빠의 말에 나는 굳게 끄덕였다. 오빠는 아침 일찍부터 독자적인 정보망을 사용해서 안경 없이 코일도메인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타라에 대해서 여러모로 조사해 주었던 듯했다. 그리고 어제처럼 언니와 오빠들과 넷이서 저녁을 먹고 앞으로의 일을 간단히 밝혔다.
언니는 이루히메역에서 다이코쿠행 야행열차에 올랐다. 23시 17분에 출발하는, 내가 올 봄에 탔던 것과 같은 열차였다.
그 무렵 나는 항상 신세를 지고 있었던 찻집 아주머니의 방에 묵을 수 있었다. 혼자 사는 아주머니의 방에는 여러 나라에서 사온 천과 인형이 멋들어지게 장식되어 있어서, 방안은 매우 활기차고 형형색색이었다. 푹신한 이불에서 푹 자고 일어나자, 무지카 오빠가 맞이하러 와 주었다.
[어때? 몸 상태.] 오빠가 물었다.
[괜찮아.]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우리들이 갈 곳 근처에는 작은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걸으면서 오빠가 알려주었다.
[형이 말했어. 라면집.]
라면집의 아는 형이 알려주었다는 뜻일까. 무지카 오빠의 말투에는 특징이 있었는데, 대개는 단어가 뒤죽박죽 나열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이해하는 데에 고생했지만, 익숙해지면 알아듣기 쉬웠다. 나와 오빠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장거리 트럭에 주의하면서 나란히 국도를 따라 나아갔다.
[공장은 없어. 지금은. 망했대. 한참 전에.]
그곳이 코일스의 공장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작년 봄까지 그 일대를 몇 번이나 가본 적이 있었지만 공장을 본 적은 없었다. 그 일대는 서쪽 곶이라고 불리는, 이루히메 등대가 있는 곳이었다.

여름에는 언제나 잡초에 뒤덮여 있던 그곳은, 지금은 말라죽은 풀투성이로 맨땅이 엿보였다. 눈앞에 등대가 선 이곳을, 나는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서 있었다.
이런 곳이었다니... 나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날씨는 매우 좋았는데, 그 주변만은 침침하게 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발밑에 전뇌안개가 뒤덮고 있었고 구석구석까지 회색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는 불안정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파손된 영상이었다. 출입금지가 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등대가 낡아서 그런 게 아니라, 공간이 위험했던 것이다. 버스무덤을 떠올렸다. 움직이지 않는 버스가 방치된 그곳과 버려진 등대가 서 있는 이곳은 매우 닮았다.
꿀꺽 침을 삼키고 오빠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여기서부터는 덴스케랑 둘이서 갈게요.]
발밑을 보자 덴스케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가 걱정스럽게 나를 보았다. 오빠는 나보다 네 살 위였지만, 매우 섬세해서 언뜻 보면 나보다 연하로 보일 때도 있었다. 하라켄, 뭐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성적이고 상처입기 쉬운 점이 이 오빠와 매우 닮았다.
[괜찮아요. 저 혼자 갈게요.]
다시 한 번 말하자, 조금 망설이던 오빠가 겨우 끄덕였다. [조심해.]
나는 꾸벅 머리를 숙이고 등대를 다시 보았다. 서치나 큐브가 날아오지 않을 때의 버스무덤에서 걷는 법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덴스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등대를 향해서 걸었다. 타라와 마지막으로 찾아온 모험의 장소를.
입구에 줄이 쳐져 있었고, 거기에 출입금지 푯말이 걸려있었다.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줄을 비집고 들어가, 부서져서 열려있는 입구에서 등대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안경을 쓰지 않았을 때에는 등대 안에 있으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들렸었다.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은 모두 안개로 뒤덮여있었다. 안개모양으로 눈앞에 계단이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안개에 파묻히려고 하는 덴스케를 들어 올려서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올라갔다. 돌아서, 그리고 올라간다. 그 말대로였다. 역시 타라가 알려준 것은 이곳이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갑자기 시야가 맑아져서 얼굴을 들었다. 계단이 끊어져있었다. 아니, 계단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등대의 벽도 난간도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빛을 머금은 안개만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다. 확신이 섰다. 나는 덴스케를 받쳐 안고, 오른손으로 키보드를 꺼냈다. 덴스케에게 저장해두었던 암호를 입력했다. 파일이 열렸다. 빛이 사방을 휩싸더니 전뇌기기가 몇 개 출현했다. 나는 그 중 하나에 덴스케를 살며시 놓았다. 덴스케는 맹한 얼굴로 내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덴스케의 위로 하나의 열쇠가 떠올랐다. 이것이다. 이게 덴스케의 목걸이에 저장된 압축을 푸는, 저쪽세계로 가는 입구를 여는 열쇠였다. 나는 열쇠를 쥐고 목걸이의 열쇠구멍에 천천히 찔러넣었다. 충격이 일었다. 뜨겁거나 아프지 않았고, 그저 온몸을 두드렸다. 열쇠에서 손을 떼고 호흡을 고르자, 주위의 빛이 부드러워지다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격렬한 명멸이 시작되었다.
덴스케의 몸이 장치에 반응하고 있었다. 덴스케의 온몸이 빛의 입자가 되어 산산이 흩어지려고 했다. 반짝버그? 덴스케가 반짝버그가 되어 분해되려는 건가! 폐공장의 지하실에서 아마사와가 저쪽세계로 가버렸을 때와 같았다. 덴스케의 변화는 독특한 공간이 지닌 자기장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덴스케.]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저 장치 앞에서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덴스케가 사라져버렸다.
[덴스케!]
눈앞으로 커다랗게 검은 열쇠구멍이 열렸다. 그 너머로 [꺙.]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덴스케였다. 사라지지 않았다. 덴스케가 먼저 저쪽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다행이다. 나도 서둘러야해. 그런데 나는 어떻게 들어가면 되지?
열쇠구멍에서 분리되듯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눌이었다.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눌은 나를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이야, 이것은 정상적인 눌, 눌캐리어였다. 전에는 저쪽세계에서 이쪽세계로 정보를 뽑기 위해 만들어진 탐색용 전뇌물체였다.
살며시 다가가 보았다. 눌의 눈 주변이 점멸했다. 잠시 숨을 죽이고 살펴보자 이윽고 눌에서 음성이 들렸다.
<아이디를 확인했습니다. 오코노기 선생님, 시험영역으로 접속하시겠습니까?>
오코노기 선생님? 의아하다고 생각하다고, 바로 우리 할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바로 안경이었다. 눌케리어는 할아버지의 것이었던 이 안경의 사용자정보를 읽어들인 것이다.
눈앞에 <YES/NO>라고 창이 열렸다. <YES>를 눌렀다. 순간 열쇠구멍이 밝게 빛났고,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나는 빛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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